한국사 공부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

후니 NO.1 2022. 6. 9. 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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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

ㄱ. 정부 수립의 추진

(1) 배경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과 소련은 각기 남북한에서 별도의 정부를 세우는데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2) 북한

소련은 북한에서 공산주의자들에 의한 사실상의 정부를 세워 통치 체제를 확립하였으며, 이를 남한으로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므로 광복 이후 공산당을 중심으로 하는 공산주의 활동은 점점 무력 투쟁의 양상을 보여주게 되었다.

(3) 남한

이승만 등의 정치 지도자들은 시급히 독립 국가를 수립하여 모든 국민의 열망을 성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ㄴ. 한국 문제의 유엔 상정

(1) 한국 문제의 유엔 이관

미 · 소 공동 위원회의 결렬로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에서 통일 정부를 수립하는 문제에 관해 의견을 달리하게 되자, 미국은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이관하기로 결정하였다.

(2) 유엔 총회의 결의

㉠ 한국 문제 결의안 확정

1947년 11월 유엔 총회에서는 미국의 제안에 따라 유엔 감시 아래 인구 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통한 국회 구성과 통일 정부의 수립, 총선거를 감시하기 위한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의 설치, 통일 정부 수립 후 미 · 소 양국 군대의 철수를 골자로 하는 한국 통일안을 가결하였다.

㉡ 소련의 반대

이에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인도, 오스트레일리아, 캐나다, 중국, 프랑스 등의 대표로 구성되어 1948년 1월에 남한에 입국하였다 그러나 소련은 남한까지도 공산화하려 하였기 때문에 유엔 총회의 통일안에 반대하였으며,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이 북한에 들어오는 것조차 거절하였다.

(3) 유엔 소총회의 결의(1948. 2)

소련의 입북 거부로 유엔 통일안의 실현이 불가능해지자, 유엔 소총회는 한국 임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에서 선거를 치르도록 하여 독립국가를 건설하자는 남한 단독 선거의 방안을 모색하였고, 유엔의 결의에 따라 임시 위원단은 1948년 5월 10일 안에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2. 남북 협상

ㄱ. 배경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결렬된 후 이승만과 한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한 우익 세력의 단독정부 수립 운동은 더욱 본격화되었으며, 유엔 소총회에서 남한만이라도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의하여 남북 분단이 기정 사실화되었다.

ㄴ. 단독정부 수립 반대

김구(한국 독립당)와 김규식(민족 자주 연맹) 등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이 한반도의 분단을 영구화한다고 주장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한 정치 지도자 회담을 개최하자고 제안하였다. 특히, 김구는 '삼천만 동초에게 읍고함'이라는 성명을 통해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ㄷ. 결과

1948년 4월에 평양에서 약 10일간에 걸친 남북 지도자 회의가 개최되어 남한 단독정부의 수립을 반대하고 미 · 소 양군의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이와 함께 김구 · 김규식 · 김일성 · 김두봉의 4자 회담이 열렸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끝나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김구 · 김규식 등의 남북 협상은 실패하였다. 미 · 소 대립에 의한 냉정 체제하에서 남북한이 각각 미국과 소련을 배경으로 단독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노력은 실현될 수 없었지만, 통일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한 자주적 노력이었고, 남북 분단을 극복하기 위한 주체적 평화 통일 논의의 일환이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김구의 "3천만 동포에게 읍고함"(1948. 2. 10)

친애하는 3천만 자매 형제여!
··· 통일하면 살고 분열하면 죽는 것은 고금의 철칙이니 자기 생명을 연장하기 위하여 조국의 분열을 연장시키는 것은 전 민족을 죽음의 구덩이에 넣는 극악 극흉의 위험한 일이다. ··· 마음속의 38도선이 무너지고야 땅 위의 38도선도 철폐될 수 있다. ···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 38도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 정부를 세우는 데에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 남북 협상 노력의 실패
1948년 5월 초에 김구와 김규식 일행은 서울에 돌아왔고, 김구가 이끈 한국 독립당과 김규식의 민족 자주 연맹은 5 · 10 총선거에 불참하였다. 김구는 이듬해 6월에 안두희의 흉탄을 맞아 서거하엿으며(1949. 6. 26), 김규식은 6 · 25 전쟁 때 납북됨으로써 통일 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이들의 이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3. 대한민국 정부 수립

ㄱ. 5 · 10 총선거 실시(1948)

(1) 배경

유엔 소총회의 결의와 대다수 국민의 열망에 따라 제헌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5 · 10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김구, 김규식 등이 이끄는 중도 우파(남북 협상파)와 공산주의자들은 불참하였다.

(2) 좌익의 반대 투쟁

남조선 노동당(남노당)의 총파업 단행과 제주도 4 ·3 사건(1948)의 유혈 사태를 일으켜 반대 투쟁을 전개하였다.

(3) 결과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보통 · 비밀 선거인 5 · 10 총선거가 남한에서 실시되어 제헌 국회가 구성(1948. 5. 31)되고,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이 제정되었다(1948. 7. 17).

㉠ 제헌 국회 구성

제헌 국회는 의장에 이승만, 부의장에 신익희와 김동원을  선출하고 헌법 제정에 착수하였으며, 우리나라의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결정하였다. 제헌 국회 한국 민주당이 29석을 차지하였다. 이 선거에는 김구와 김규식 계열이 불참하였으며, 일부는 무소속으로 출마하였다.

㉡ 헌법 제정

제헌 국회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법통을 계승한 민주 공화국 체제의 헌법을 제정하여 7월 17일에 공포하였다. 헌법은 대통령 중심제의 권력 구조를 골간으로 하면서 내각제 요소도 가미하고 있었다. 그리고 임기 4년의 대통령은 국회에서 간접 선거로 선출하고 국회는 단원제로 구성하였다.

(4) 의의

5 · 10 총선거는 21세 이상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이 부여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실시된 서구식 보통 선거였다.

(5) 한계

북한과 제주도 일부 지역에서는 총선거가 실시되지 못하였으며, 남북 협상파와 사회주의계는 불참하였다.

ㄴ. 정부 수립(1948. 8. 15)

제헌 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된 이승만은 이범석을 국무총리로, 김병로를 대법원장으로 임명하여 내각과 사법부를 구성하고 1948년 8월 15일에 대한민국의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하였다. 이날 하지 사령관은 군정의 종언을 선언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았다.

ㄷ. 유엔 총회의 승인(1948. 12. 12)

파리에서 개최된 제3차 유엔 총회는 48대 6이라는 압도적 다수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 정부임을 공인하였고, 유엔 한국 임시 위원단에 대신하여 유엔 한국 위원단을 새로이 창설하고 외국군 철수 문제를 한국 정부와 협력하도록 결의하였다. 이어서 대한민국은 미국을 비롯한 자유 우방 50여 개국으로 부터 각각 승인을 받았다. 이로써,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 국가를 이룩했을 뿐만 아니라, 외세의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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