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국 광복군 창설
ㄱ. 본격적인 항일 투쟁 준비
그 후 임시 정부의 김구, 지청천 등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전하던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 각 처에 흩어져 있던 무장 투쟁 세력을 모아 정부 요인과 중국 정부 요인이 다수 참석한 가운데 충칭에서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9. 17).
ㄴ. 모병 활동
한국 광복군은 꾸준한 모집 활동을 통해 1941년에는 약 300명의 대원을 확보하였다. 모병 활동은 주로 한인이 많이 살고 있는 화북 지역과 장시성 등의 중국 남부 지역에서 이루어졌다.
ㄷ. 미주 지역 한인들의 지원
미주 지역 한인은 지리적으로 멀어 무장 투쟁이나 의열 투쟁 등을 하기가 어려웠지만, 재정 지원 활동과 선전 및 외교 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1941년 4월에는 대한인 국민회 등 9개 단체가 모여 해외 민족 대회를 개최하고 재미 한족 연합 위원회를 결성하였다. 특히, 한인 국방 경비대(맹호군)를 조직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려는 노력도 기울였는데, 임시 정부는 맹호군을 한국 광복군의 군사 조직으로 편입하였다.
ㄹ. 중국 국민당의 군사 원조
초기 한국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의 군사 원조를 받아 군대 면모를 갖추었고, 한국의 청년들을 중국의 정규 군사 학교에 입교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러나 임시 정부는 이러한 원조를 받기 위해 '한국 광복군 행동 준승 9개 항'을 맺으며 중국 국민당군의 지휘를 받아야 했다. 1944년 8월에 가서야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의 지휘권을 가지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ㅁ. 군사력 보강
광복군이 창설되기 앞서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1935) 쪽에서는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 각징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조선 의용대의 대원이 화북 지역으로 이동한 후 남은 세력들을 한국 광복군에 합류시켜 군사력을 증강하였다(1942).
2. 광복군의 활약
ㄱ. 대일 · 대독 선전 포고(1941)
일제가 1941년 12월에 미국 하와이의 진주만을 기습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임시 정부는 즉각 대외 활동을 펴 대일 선전 포고문을 발표하였으며, 한국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창전 시켰다. 그 후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함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포고문(1941. 12) 우리는 3천만 한국 인민과 정부를 대표하여 삼가 중, 영, 미, 소, 캐나다, 기타 제국의 대일 선전이 일본을 격패케 하고 동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 됨을 축하하며, 이에 특히 다음과 같이 성명한다. 1. 한국 전 인민은 현재 이미 반침략 전선에 참가하였으니, 한 개의 전투 단위로서 추축국에 선전한다. 2. 1910년 합병 조약과 일체의 불평등 조약의 무효를 거듭 선포하며, 아울러 반침략 국가인 한국에 있어서의 합리적 기득권익을 존중한다. 3. 한국, 중국 및 서태평양으로부터 왜구를 완전히 구축하기 위하여 최후 승리를 거둘 때까지 혈전한다. 4. 일본 세력하에 조성된 창춘 및 난징 정권을 절대로 승인하지 않는다. 5. 루스벨트, 처칠 선언의 각 조를 견겨리 주장하며, 한국 독립을 실현하기 위하여 이것을 적용하여 민주 진영의 최후 승리를 축원한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 주석 김구, 외무부장 조소앙] |
ㄴ. 연합 작전 전개
제 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한국 광복군은 중국에서는 중국 국민당군과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1943년에는 영국군의 요청에 따라 한 · 영 군사 협정을 맺고, 한국 광복군의 공작대를 인도와 미얀마 전선에 파견하여 포로 심문, 정보 수집, 암호 번역과 선전 전단의 작성, 대적 회유 방송 등의 심리전 등을 담당하였다.
ㄷ. 국내 진공 작전 준비
한국 광복군은 중국군 · 영국군과 공동 작전을 수행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광복을 우리 손으로 쟁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 전면전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또한, 미국과 연합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1) 국내 정진군의 편성
광복군 총사령관 지청천, 지대장 이범석 등은 중국에 와 있던 미국군과 연합하여 광복군을 항공기나 잠수함으로 국내에 투입하여 일본군을 몰아내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45년 3월 미국 전략 정보국(OSS)과 합작하여 국내에 침투할 특수 요원인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고, 이들에게 1945년 4월부터 중국의 시안과 푸양에서 특수 공작 훈련을 실시하였다.
(2) 계획의 좌절
광복군은 특수 훈련을 받은 대원들을 국내에 침투시켜 무장 투쟁의 거점을 확보하고, 일제의 주요 시설을 파괴하면서 미군의 상륙과 때를 맞춰 궐기하여 우리 힘으로 일본군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1945. 8. 20). 그러나 모든 공작 훈련을 마치고 국내 정진군이 국내에 투입되기 직전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광복군의 한반도 내 실전 투입은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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