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국 관내의 민족 운동
ㄱ. 민족 연합 전선 추진
(1) 일제의 중국 침략 본격화
만주 사변과 일제의 만주 점령으로 대일 전선이 화북 지방으로 옮겨짐에 따라 중국 관내는 무장 투쟁의 주요 거점으로 떠올랐다. 여기에 만주에서 활동하던 무장 독립운동 단체까지 내려오면서 중국 관내 독립운동 단체들은 대일 항전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위해 민족 연합 전선을 추진하였다.
(2) 민족 연합 전선 형성
당시 중국 관내에는 의병 운동가, 무정부주의자, 공산주의자 등 다양한 성향의 독립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중국 관내 대표적인 독립운동 세력이었던 한국 독립당과 의열단을 중심으로 항일 전선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여러 차례의 노력이 있었는데, 그 성과로 나타난 것이 1935년 난징에서 창당된 민족 혁명당이었다.
○ 한국 독립당(1930. 1) 이동녕, 안창호, 김구, 조소양 등 임시 정부를 지지할 목적으로 결성한 정당으로, 당시 중국 관내에서 활동하던 민족주의계 인사들은 거의 참여하였으며, 삼균주의에 기초한 강령을 채택하였다. 지청천 등이 만주에서 조직한 한국 독립당(재만 한국 독립당)과는 다른 정당이다. |
ㄴ. 민족 혁명당 창건(1935. 7)
(1) 배경
한국 독립당(조소앙 · 이동녕 · 안창호), 조선 혁명당(지청천 · 최동호), 한국 동지회(김규식) 등의 우파 계열과 조선 의열단(김원봉)의 좌파 계열이 참여하여 한국 대일 전선 통일 연맹을 결성하였다(1932. 11)
(2) 창당
임시 정부를 고수하려는 일부 인사를 제외한 독립 운동가들이 결집하여 민족 혁명당을 창건하였다(1935. 7). 즉, 민족 혁명당은 한국 독립당과 의열단, 만주에서 이동해온 독립 운동 세력 등 민족주의 계열과 사회주의 계열의 정당 · 단체들이 뭉쳐 좌 · 우의 파벌적 대립을 지양하고 하나로 뭉쳐 결성한 중국 관내 최대 규모의 통일 전선 정당이었다.
(3) 목표
민족 혁명당은 단순히 여러 단체가 연합한 것이 아니라 민족 독립 운동의 단일 정당을 목표로 결성되었으며,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수용하여 정치 · 경제 · 교육의 평등을 전제로 한 민주 공화국의 건설을 내세웠다.
○ 삼균주의 조소앙의 삼균주의는 독립 운동 진영의 대표적인 이론가인 조소앙이 좌우익의 대립된 이념을 지양하여 독립 운동의 기본 방략과 미래 조국 건설의 지침을 삼기 위해 체계화한 정치 사상이다. 그 요지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의 평등을 실현한다는 것을 전제로 정치 · 경제 · 교육의 평등을 강조하였으며, 그 구체적 방법으로 보통 선거제, 토지와 대생산 기관의 국유제, 국비에 의한 의무 교육, 언론 · 출판 · 집회의 자유 등을 내세웠다. 이 이론은 1920년대 말에 구상되어 1930년대에 한국 국민당, 한국 독립당의 정강으로 채택되고, 1941년에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건국 강령으로 수용되었다. |
(4) 약화
김구 등 임시 정부를 고수하려는 독립 운동가들은 처음부터 불참하였고, 김원봉을 중심으로 한 의열단 계통의 인사들이 당권을 잡고 민족 혁명당을 주도하자, 조소앙 · 지청천 · 최동호 등 민족주의계 일부 인사들이 탈당하여 통일 전선 정당으로서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5) 개편
민족 혁명당은 김원봉을 중심으로 조선 민족 혁명당(1937)으로 개편되었으며, 조선 민족 혁명당은 중 · 일 전쟁으로 상황이 급변하자 '진정한 민주주의 독립 국가 건설'을 목표로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고,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대를 만들었다.
○ 김구의 다른 길 임시 정부의 해체를 원하지 않았던 김구는 조선 민족 혁명당에 참가하지 않고 우익 전선의 연합체로서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를 조직하였다. 이로써 중국 관내의 독립 운동 세력은 우익의 한국 광복 운동 단체 연합회와 좌익의 조선 민족 전선 연맹으로 나뉘었다. |
ㄷ. 조선 의용대(1938. 10)
(1) 창설
1937년 일제가 중 · 일 전쟁을 일으키자, 민족 혁명당을 계승한 조선 민족 혁명당을 중심으로 통합에 찬성하는 공산주의 정당과 연합하여 1937년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을 결성하였다. 조선 민족 전선 연맹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1938년 조선 의용대를 창설하였다.
(2) 활동
김원봉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 의용대는 중국 관내 최초의 한인 무장 부대로서 중국 국민당의 정부군과 합세하여 양쯔강 중류 일대에서 일본군의 진격을 막았으며, 전투 참전보다는 주로 정보 수집과 포로 심문, 후방 교란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는 조선 의용대가 일제의 중국 침략에 맞서 국제 지원군의 일원으로 항일전에 참전했음을 의미하였다.
ㄹ.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1941. 7)
(1) 조선 의용대의 항일 북상 이동
일부 조선 의용대 대원들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과도한 통제와 소극적인 항일 투쟁에 반발해 좀 더 적극적인 항일 투쟁을 위해 조선인 사회주의자들과 중국 공산당 세력이 대일 항전을 펼치고 있는 화북 지역으로 활동 근거지를 옮겼다.
(2)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의 활동
최고 지도부와 일부 병력을 제외한 대부분의 병력이 국민당 지역을 떠나 대거 북상하자, 화북의 독립 운동가들은 이들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목적으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를 결성하고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를 편성하였다.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일본군과 호가장 전투(1941), 반소탕전(1942) 등에서 큰 전과를 올렸다.
(3) 조선 의용대 잔여 세력의 진로
이후 조선 의용대 화북 지대는 조선 독립 동맹의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군에 흡수되어 직간접적으로 항일 투쟁에 가담하였다. 그리고 화북으로 이동하지 않은 조선 의용대의 병력은 김원봉의 지휘 아래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였다(1942).
ㅁ. 조선 독립 동맹(1942)
(1) 조선 의용군 결성(1942. 7)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이 주축이 된 화북 조선 청년 연합회는 1942년 조직을 정비하여 조선 독립 동맹을 결성하고,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그리고 군사 조직인 조선 의용군을 결성하여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였다.
(2) 조선 의용군의 활동
조선 의용군의 옌안에 본부를 두고 화북 조선 청년 혁명 군정 학교 등을 세워 대원들을 교육하는 한편, 중국 공산당의 팔로군과 연합하여 태행산 지구 전투, 호가장 전투 등에 참가하여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1945년 소련이 대일전을 개시하자 만주로 진격하여 세력 확대를 꾀하였고, 일제가 패망한 뒤에는 국 · 공 내전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조선 의용군은 임시 정부의 한국 광복군과 더불어 중국 관내에서 활동한 대표적 독립군이었다.
(3) 광복 후 진로
조선 독립 동맹과 조선 의용군의 핵심 인물들은 광복 후 북한 정권 수립에 참여했지만, 6 · 25 전쟁 이후 김일성의 권력 강화 과정에서 대부분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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