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군정하의 남북한 문제
ㄱ. 남한의 정세
(1) 미군정의 출범(1945. 9. 9)
남한에 진주한 미군 사령관 하지 중장이 군정을 선포하고 아놀드 소장이 군정 장관에 취임하였다. 미군은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의 활동과 조선 인민 공화국 수립을 부정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마저 인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일제의 조선 총독부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친일파가 미군정에 참여하게 되는 한계성을 초래하였다. 3년간의 미군정의 실시로 남한에는 미국식의 민주 정치 체제도, 개인주의적 사고방식, 자본주의 생활 방식 등이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2) 정당의 난립과 대립
미군정 하에서 남한의 정국은 수많은 정치 단체들의 난립과 좌우익 세력 간의 대립으로 혼란을 거듭하였다.
㉠ 한국 민주당(1945. 9. 16)
송진우, 김성수, 조병옥 등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에 불참하였던 우파 세력이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봉대를 내세우며, 미군 진주 직후에 결성하였다. 한국 민주당의 중심 인물들은 친미적인 우익 정부 수립을 위한 미군정의 후원을 받아 강력한 정치 세력으로 부상하였다.
㉡ 조선 공산당(1945. 9. 16)
사회주의자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노동자, 농민을 주축으로 도시 소시민, 지식인 등으로 결성하였으며, 대지주 토지의 무상 몰수를 주장하였다.
㉢ 국민당(1945. 9. 24)
신민족주의와 신민주주의의 정치 이념을 내세워 좌우 이념을 통합하고자 일제 시대 신간회를 주도하였던 안재홍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중도 우파의 정당이다.
㉣ 한국 독립당(1945. 11)
김구 일행이 귀국하여 결성하였다.
㉤ 조선 인민당(1945. 11. 12)
진보적인 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좌우 합작을 추진하고자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를 주도하였던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중도 좌파의 정당이다.
㉥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
이승만이 귀국하여 결성한 단체로 남한의 우익 정당들을 잠정적으로 통합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좌익이 참여를 거부함으로써 좌 · 우익의 대립이 더욱 심화되었다.
(3) 경제적 혼란
8 · 15 광복 이후 경제도 급등하는 물가와 쌀을 비롯한 생활 필수품의 결핍으로 큰 혼란을 겪었다. 이는 국민의 일상생활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군정은 처음에는 남한의 실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이러한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처하지 못하였다.
(4) 사회적 혼란
남한 내에 존재해 왔던 박헌영 지도하의 남로당과 공산주의자들의 사회 교란으로 각지에서 유혈 충돌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ㄴ. 북한의 정세
(1) 공산주의자 중심의 정치 활동
소련군의 진주로 자주적으로 독립 국가를 수립하려던 민족주의 인사들의 활동이 금지되었으며, 그 대신 소련군과 함께 북한에 들어온 김일성 등 공산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정치 활동이 전개되었다.
(2) 공산 정권의 기반 조성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은 사전에 준비된 계획에 따라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았으며, 그들에 반대하는 조만식 등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숙청하였다.
2. 신탁 통치 문제와 좌 · 우 합작 운동
ㄱ.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1945. 12)
(1) 배경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가 분단되고, 남과 북에 미군과 소련군의 군정이 실시되는 가운데 미국, 영국, 소련의 3국 외상은 모스크바에서 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협의하게 되었다.
(2) 내용
이 회의에서는 한국에 임시 민주 정부의 수립, 미 · 소 공동 위원회의 설치, 공동 위원회와 임시 정부는 최고 5년간의 신탁 통치 협정을 만들 것 등을 결정하였다. 신탁 통치는 한민족이 완전한 독립 국가를 건설할 때까지 미 · 영 · 중 · 소 4개국이 한반도를 최고 5년간 공동 관리하겠다는 방안을 말한다.
(3) 신탁 통치 반대 운동
신탁 통치는 독립할 능력이 없는 나라를 일정 기간 동안 강대국이 통치하는 것으로 우리 민족에게는 모욕으로 생각될 수 밖에 없었다. 이 소식이 국내에 전해지자 비상 정치 회의(김구)와 독립 촉성 중앙 협의회(이승만)가 비상 국민 회의를 결성하여 전국적으로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치열하게 전개하였으며, 이는 제2의 광복 운동과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4) 좌익 계열의 찬탁 운동
처음에는 공산주의자들도 신탁 통치에 반대하였지만, 그들은 소련의 사주를 받아 모스크바 3국 외상 회의의 결정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5) 좌 · 우익의 대립
이러한 미 · 소 냉전의 국제 질서 속에서 우리 민족은 신탁 통치에 반대한 우익과 모스크바 3국 회의 결의안에 찬성한 좌익이 격렬하게 대립하였다.
ㄴ. 미 · 소 공동 위원회
(1) 개최
반탁 운동이 거세게 전개되고 좌우의 대립이 심해지는 가운데 모스크바 협정에 따라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서울의 덕수궁에서 두 차례 개최되었다.
(2) 제1차 미 · 소 공동 위원회(1946. 3)
임시 정부 수립에 참여할 단체에 대한 미 · 소간의 의견 대립으로 처음부터 난관에 부딪혔다. 소련은 신탁 통치 결정을 지지하는 정치 단체만을 미 · 소 공동 위원회와의 협의 대상으로 참여시키고, 모스크바 협정안에 반대하는 정당 · 단체와는 협의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미국은 표현의 자유를 내세워 모든 정치 단체를 참여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3) 제2차 미 · 소 공동 위원회(1947. 5)
임시 정부 수립에 참가를 신청한 정당, 단체와 단체의 회원수를 놓고 서로의 주장이 다른 상황에서 미국은 4개국(미국 · 영국 · 중국 · 소련)외상 회담에 맡기자고 제의하였으나, 소련은 모스크바 회의에서 합의된 사항이 아니라는 이유로 반대하였다.
(4) 위원회의 결렬
임시 정부 수립을 위한 두 차례의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열렸으나, 협의 대상이 될 정당과 사화 단체 선정 문제에서 미 · 소간의 서로 다른 주장으로 끝내 아무런 합의도 얻지 못한 채 위원회는 무기 휴회에 들어간 뒤 미국이 한반도 문제를 유엔에 상정함으로써 완전히 결렬되었다.
○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플랜 발표(1947년) 공산 세력의 위협에 저항하고 있는 자유민에 대해서 미국은 지원할 것을 천명한 것으로 소련에 대한 강경책으로 냉전이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관련 미국은 그리스를 원조하여 공산 반란을 진압하고 터키에도 원조를 제공하였다. |
ㄷ. 조선 정판사 위조지폐 사건(1946. 5)
(1) 내용
좌익의 통일 전선인 조선 공산당(민주주의 민족 전선)이 남한의 경제 혼란과 당비를 조달할 목적으로 조선 정판사를 이용하여 위조지폐를 만들어 유통시킨 사건이다.
(2) 결과
미군정이 공산당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리고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를 폐간시키는 등 공산당을 탄압함으로써 미군정과 좌익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지하로 숨어들어 대규모 폭동과 서울 철도 소요를 일으켰으며, 민주주의 민족 전선도 크게 위축되었다.
ㄹ. 좌 · 우익 합작 운동
(1) 배경
반탁 운동으로 좌우가 대립하고 제1차 미 · 소 공동 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통일 정부의 수립이 늦어지자 일부 우익 세력은 자신들의 노선을 중심으로 한 정부 수립을 추진하였으며, 이승만은 1946년 6월 정읍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였다.
(2) 좌 · 우 합작 위원회(1946.7)
남한과 북한에서 각각 단독 정부를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진행되자 이에 분단을 우려한 중도 세력은 좌우의 대립을 극복하기 위하여, 중도 우파 김규식과 중도 좌파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좌 · 우 합작 운동을 추진하였고, 좌 · 우 합작 7원칙을 발표하였다.
○ 좌 · 우 합작 7원칙(1946. 10. 7) 1. 조선의 민주 독립을 보장한 3상 결정에 의하여 남북을 통한 좌우 합작으로 민주주의 임시 정부를 수립할 것 2. 미 · 소 공동 위원회의 속개를 요청하는 공동 성명을 발표할 것 3. 토지 개혁에 있어 몰수, 유조건 몰수, 체감 매상 등으로 토지를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여하며, 시가지의 기지 및 대건물을 적정 처리하며 중요 산업을 국유화하며, 사회 노동 법령 및 정치적 자유를 기본으로 지방 자치제의 확립을 속히 실시하며, 통화 및 민생 문제 등을 급속히 처리하여 민주주의 건국 과업 완수에 매진할 것 4. 친일파 민족 반역자를 처리할 조례를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입법 기구에 제안하여 입법 기구로 하여금 심리 결정하여 실시케 할 것 5. 남북을 통하여 현 정권하에 검거된 정치 운동자의 석방에 노력하고, 아울러 남북 좌우의 테러적 행동을 일체 즉시로 제지토록 노력할 것 6. 입법 기구에 있어서는 일체 그 권능과 구성 방법, 운영 등에 관한 대한을 본 합작 위원회에서 작성하여 적극적으로 실행을 기도할 것 7. 전국적으로 언론 · 집회 · 결사 · 출판 · 교통 · 투표 등의 자유를 절대 보장되도록 노력할 것 |
(3) 미군정의 좌 · 우 합작 구성
미군정은 좌 · 우 합작 위원회와 한국 민주당을 중심으로 김규식을 의장으로 하는 남조선 과도 입법 의원을 구성(1946. 12)한 뒤, 안재홍을 민정 장관, 김용무를 대법원장에 임명하고 남조선 과도 정부를 설치하였다. 중도 좌파의 여운형은 입법 기구 조직에 반대하여 합작 위원회에서 탈퇴하였다. 휴회되었던 미 · 소 공동 위원회도 다시 재개하였다.
(4) 좌 · 우 합작 운동의 실패
좌 · 우 대결을 피하고 민족이 단결하여 통일 임시 정부를 수립하려고 하였던 좌 · 우 합작 운동은 광복 정국에서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었던 김구 및 이승만 세력과 조선 공산당이 참여하지 않음으로써 현실적으로 성공하기 어려웠다. 핵심 인물인 여운형이 암살(1947. 7)되었고, 미국 정책이 소련과의 냉전으로 인하여 강경책으로 선회하면서 좌 · 우 합작 운동에 대한 지원 방침을 철회하였다. 결국 미국은 우익 세력을 옹호하기 시작하였고, 한국의 문제를 국제 연합에 상정함으로써 좌 · 우 합작 운동도 실패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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