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복 직전의 건국 준비 활동
ㄱ. 배경
그동안 국내외에서 민족의 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노력하던 우리 민족은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전을 확신하고 건국을 준비해 왔다.
ㄴ. 국외에서의 건국 준비 활동
(1) 대한민국 임시 정부
㉠ 한국 독립당 결성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민족주의 계열의 조소앙의 한국 독립당, 김구의 한국 국민당, 지청천의 조선 혁명당 등의 독립 운동 단체들을 한국 독립당으로 통합하여 그 지지 기반을 강화하였다.
㉡ 대한민국 건국 강령의 제정 · 공포
임시 정부의 기초 정당인 한국 독립당에서 일본의 패망하여 대비하여 조소앙이 제창한 삼균주의(정치 · 경제 · 교육의 균등)를 채택하여 1941년에 제정 · 공포하였다. 주요 내용으로는 보통 선거를 통한 민주 공화국의 수립, 홍익인간을 최고의 공리로 설정, 의무 교육 실시, 토지의 국유화와 빈농에게 토지 우선 분배, 적산을 국유화, 대규모 생산 기관의 국유화와 중소기업의 사영 등을 규정하였다.
㉢ 광복군 조직의 보강
임시 정부는 조선 민족 혁명당의 지도자들을 받아들여 정부의 체제를 개편하였으며, 조선 민족 혁명당이 이끌었던 조선 의용대를 흡수하여 한국 광복군을 보강하고, 항일 전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하였다.
(2) 조선 독립 동맹(1942. 7)
㉠ 목적
중국의 화북 지방 연안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던 김두봉(주석), 김무정, 박효삼, 최창익, 한빈 등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도 독립 · 자유의 조선 민주 공화국 수립을 목적으로 건국 준비에 나섰다.
㉡ 건국 강령
법률적 · 사회적 생활상에 있어서 남녀 평등 실현, 전 국민의 보통 선거에 의한 민주 정권 수립, 언론 · 출판 · 집회 · 결사 · 신앙 · 사상 · 태업의 자유 보장, 국민의 인권 존중 사회 제도 실현, 의무 교육 제도를 실시하고 이에 필요한 경비는 국가 부담, 일제에 협력한 기업의 몰수 분배, 조선에 있는 일본 대기업의 국영화와 토지 분배 등을 제시하였다.
㉢ 조선 의용군 조직
중국 공산당 군대와 연합하여 호가장 전투에서 큰 공을 세우고 해방 후 무장 해제를 당한 가운데 북한으로 이동해 인민군에 편입되었다.
ㄷ. 국내에서의 건국 준비 활동
(1) 조선 건국 동맹(1944. 8)
㉠ 조직
국내에서도 일제의 가혹한 탄압 속에서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여운형, 조동우 등이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을 망라하여 조직하였고, 노동자 · 농민층까지 흡수하였다.
㉡ 성격
중국에서 활동하던 조선 독립 동맹(연안파)과도 연결되고 있어서 민족 연합 전선의 형태를 띠었다.
㉢ 건국 강령
각인 각파를 대동단결하여 거국일치로 일본 제국주의 제 세력을 구축하고 조선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회복할 것. 반추축 제국과 협력하여 대일 연합 전선을 형성하고 조선의 완전한 독립을 저해하는 일체 반동 세력을 박멸할 것. 건설 부면에 있어서 일체의 시정을 민주주의 원칙에 의거하고, 특히 노 · 농 대중의 해방에 치중할 것 등을 내용으로 일제의 타도와 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추구하였다.
(2) 국내외 건국 준비 활동의 공통 강령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을 추진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일제의 패망 후에 민주 공화국을 수립한다는데 뜻을 같이하여 각각 민주 공화국 건설을 위한 원칙을 발표하였다.
2. 8 · 15 광복
ㄱ. 광복의 요인
(1) 줄기찬 독립 투쟁의 전개
1945년 8월 15일, 우리 민족은 일제의 억압에서 벗어나 광복을 맞이하였다. 이는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하고, 동시에 우리 민족이 국내외에서 줄기차게 독립투쟁을 전개한 결과였다.
(2) 다방면에서 전개
민족의 독립을 되찾기 위한 노력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교 등 모든 영역에 걸쳐서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3) 다양한 방법으로 전개
독립 운동의 방법도 무장 투쟁, 외교 활동, 민족 문화 수호 운동 또는 민족 실력 양성 운동 등으로 전개되었다.
(4) 국제적 분위기
줄기차게 전개된 민족 독립운동이 국내외에 널리 알려짐에 따라 국제적으로도 우리 민족의 독립 국가 수립은 당연히 이루어져야 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ㄴ. 광복의 의의
8 · 15 광복은 온 민족이 일제의 지배에 맞서서 투쟁해 온 결실이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의 희생과 헌신은 민족 운동사의 위대한 업적으로 남게 되었다.
3.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1945. 8. 15)
ㄱ. 발족
광복 이후 최초의 정치 단체로 조선 건국 동맹을 주도하던 사회주의자 여운형(위원장)이 조선 건국 동맹을 모체로 패망 직전에 일제로부터 행정권의 일부(정치범과 경제범의 석방, 3개월간의 식량 확보, 조선인의 정치 활동 및 청년 · 학생 · 노동자 등의 조직 활동에 대한 불간섭)를 이양받고 건국 준비 위원회(건준)를 발족시켰다.
ㄴ. 조직
중도 우파 인사들과 온건 좌파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위원장은 조선 건국 동맹을 주도하였던 여운형이 맡았으며, 부위원장은 중도 우파인 안재홍이 맡았다. 그러나 송진우, 김성수 등 민족주의 우파 세력(임정 봉대)이 불참하는 한계성이 있었다.
ㄷ. 활동
치안대와 식량 대책 위원회의 설치, 전국 145개의 지부 조직, 건국 강령(완전한 자주독립 국가 건설, 진정한 민주주의 정권 수립, 자주적으로 국내 질서를 유지하여 대중 생활 확보) 등의 활동을 하였다.
ㄹ. 조선 인민 공화국의 선포(1945. 9. 6)
제1, 2차 조직 개편을 통해 미군이 진주하기 전에 정부를 수립하여 연합국의 인정을 받으려고 선포하였으며, 우파 민족주의자들의 탈퇴로 대표성이 약해진 점을 보완하기 위하여 이승만(우파)을 주석으로 여운형(좌파)을 부주석, 허헌(온건 좌파)을 국무 총리로 추대하였으나 중앙 위원회의 구성원 중 상당수가 박헌영, 이강국 등 공산주의자였다. 당시 이승만은 아직 귀국하지 않았으며 김구는 참여하지 않았다.
ㅁ. 해체
미군정청에서 조선 인민 공화국을 부정하는 성명(1945. 10. 10)을 발표하자, 조선 건국 준비 위원회도 해체되었다.
4. 국토의 분단
ㄱ. 한국 독립의 국제적 논의
(1) 카이로 회담(1943. 11)
제2차 세계대전 중에 미국(루스벨트), 영국(처칠), 중국(장제스)의 3국 수뇌는 이집트 카이로에서 회담을 갖고 카이로 선언을 발표하였다. 한국에 관해서는 "한국 인민의 노예 상태에 유의하여 시기에 적당한 자유 독립하게 할 것을 결의한다."라고 선언하여 최초로 한국의 독립을 결의하였다.
(2) 얄타 회담(1945. 2)
미국의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소련의 스탈린 등이 소련의 얄타에서 비밀리에 회담을 갖고, 독일에 대한 전후 처리 문제와 소련의 대일 참전 문제를 결의하였다.
(3) 포츠담 선언(1945. 7)
독일의 포츠담에서 미 · 영 · 중 · 소 등 4개국의 수뇌가 일본의 무조건 항복 등 카이로 선언의 각 조항을 충실히 이행하기로 함으로써 카이로 선언을 재확인하였으며 우리나라의 독립을 재결의하였다.
ㄴ. 국토의 분단
(1) 배경
광복의 감격과 각계각층의 건국 운동이 곧바로 자주독립 국가의 건설로 연결되지는 못하였다. 일본군의 무장 해제를 이유로 미국과 소련군이 38도선 이남과 이북에 진주하여 군정을 실시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정상들이 소련군의 대일전 참전의 결의에 따라 1945년 8월 8일에 참전한 소련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북한 지역을 재빨리 점령해 나가자, 미국 측은 소현의 한반도 단독 점령을 막고 한반도에 남아 있던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하기 위하여 38도선의 분할 점령을 제안하였고, 소련이 이에 동의하여 한반도에는 광복과 동시에 미국과 소련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가게 되었다.
○ 일반 명령 제1호(1945. 9. 2) "일본군 무장 해제는 북위 38도선 이남에서는 미국이, 이북에서는 소련이 맡는다."라는 내용으로 미 육군 태평양 지구 연합군 총사령관인 맥아더가 공포하였다. 이는 단순한 일본군의 무장 해제뿐만 아니라 한반도에 대한 분할 점령을 공식 확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
(2) 군정의 실시
소련은 얄타 비밀 협정에 따라 8월 초 38도선 이북 지역을 점령하여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평양에 소련 군정청을 설치하였다. 이어 군정은 소련군과 공산주의자들이 중심이 되어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을 숙청하고,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기반을 닦아 나갔다. 미국은 9월에 일본 본토를 점령하고 인천에 상륙하여 남한 내 일본군을 무장 해제시키고 총독부를 대신하여 군정을 실시하면서 아놀드 미 국무 장관은 친미적인 우익 정부의 수립을 후원하였다.
(3) 국토 분단
이로써 우리 민족은 스스로의 능력이나 의지와는 관계없이 자주독립의 통일 국가를 수립하지 못한 채 민족 분단의 길로 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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