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의열단과 한일 애국단

후니 NO.1 2022. 5. 31. 2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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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의열 투쟁의 전개

ㄱ. 의열 단체 결성

3 · 1 운동 이후 해외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가들은 독립 쟁취를 위해 보다 강력한 무장 조직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많은 독립군 부대가 만들어졌고, 소수의 의사와 열사들로 구성되어 일제 요인 암살이나 식민지 기관 파괴를 시도하는 의열 단체가 결성되었다.

ㄴ. 의열단(1919)

(1) 조직

3 · 1 운동 이후 일제의 지배에 맞서 항일 사상을 높이고 폭력 투쟁을 벌여 일제를 타도하기 위해 1919년 11월 만주 길림성 파로문에서 김원봉, 윤세주 등 13명이 의열단을 조직하였다.

(2) 활동

조직의 형태를 철저히 비밀에 부친 비밀 결사로 일제의 감시망을 피해 일정한 곳에 본부를 두지 않고 베이징, 상하이 등 중국 관내로 옮겨 다니면서 활발한 투쟁을 벌였다. 개인의 절대적인 자유를 실현하기 위해 권력을 비롯한 일제의 지배 기구와 제도를 부정하는 무정부주의 경향을 보이면서, 민중 봉기를 유발하기 위하여 신채호의 '조선 혁명 선언'을 행동 강령으로 삼았다. 그리고 김익상, 나석주, 김상옥 등 많은 단원들이 개인 폭력 투쟁을 통해 독립을 쟁취하려는 목적으로 민중을 착취하고 민족 운동을 탄압하던 조선 총독부 고관 · 매국노 · 친일파 등을 처단하고 조선 총독부 · 동양 척식 주식회사 · 각 경찰서 등 식민지 착취 기관을 파괴하였다.

(3) 방향 전환 모색

1920년대 후반 의열단은 개별적인 폭력 투쟁만으로는 민족 해방 운동을 조직적으로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무장 투쟁 노선으로 전환하였다. 이에 따라 단원들은 중국의 황푸 군관 학교에 입교하여 체계적인 군사 교육을 받았고, 1930년대에는 독립 운동 지도자를 양성하기 위해 중국 국민당 정부의 지원을 받아 조선 혁명 간부 학교를 설립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통합 운동에 적극적으로 앞장서 중국 관내 대부분의 항일 단체와 정당을 통합한 '민족 혁명당' 결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1935).

조선 혁명 선언

대규모 사살과 파괴를 추진하고 있던 김원봉은 선전이 뒤따르지 않는 행동만으로는 일반 민중에게 폭력 속에 들어 있는 정신을 이해 시킬수 없음을 깨달았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원봉은 신채호에게 의열단의 혁명 선언을 기초해 줄 것을 부탁하였고, 그 결과 나오게 된 것이 신채호가 쓴 조선 혁명 선언(1923. 1)이었다. 신채호는 무정부주의와 무장 투쟁론에 근거하여 외교론, 문화 운동론, 실력 양성론을 철저히 비판하면서 민중 폭력 혁명을 독립 운동의 방략으로 제시하였다.
의열단 이외의 개인적인 애국지사들의 의거

의열단원 이외에도 3 · 1 운동 직후 새로 부임하는 조선 총독 사이토를 저격했던 강우규나, 타이완에서 일본 국왕 히로히토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가 일본군의 특별 검열을 마치고 돌아갈 때 독검으로 찔러 6개월 만에 후유증으로 죽게 만든 조명하의 타이중 의거(1928) 등이 대표적이다.

ㄷ. 한인 애국단(1931)

(1) 조직

의열단이 활발하게 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무렵인 1920년대 후반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국민 대표 회의의 결렬과 이승만의 탄핵, 그리고 정부 조직 개편 등이 이어지면서 자금난과 인력 부족 등으로 침체기를 맞았다. 또한, 1930년대 들어 만보산 사건(1931. 7)이 터져 중국인들의 한국인에 대한 감정이 나빠져 중국에서의 항일 운동에 제약을 받았고, 만주 사변으로 일제가 만주를 점령하자 독립군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에 임시 정부의 국무령이었던 김구는 1931년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여 일제의 주요 인물들을 저격하는 의열 투쟁을 벌임으로써 임시 정부에 활력을 불어넣으려 하였다.

○ 만보산 사건

· 중 농민 간에 발생한 수로 싸움에서 일본 경찰이 조선 농민을 편들면서 중국 농민에게 발포까지 했는데, 이를 계기로 국내와 만주에서 두 민족 사이에 유혈 충돌이 여러 차례 발생하였다. 그 결과 중국인의 반한 감정이 확산되어 만주 지역의 동포들과 독립군 활동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 이봉창 의거(1932. 1)

한인 애국단 소속인 이봉창은 도쿄에서 일본 국왕이 탄 마차를 향해 포탄을 투척하였으나, 일왕을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이를 두고 중국 상하이 신문들은 "한국인 이봉창이 일왕을 저격하였으나 불행히도 성공하지는 못하였다."라고 크게 보도하여 거사가 성공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였다. 이에 격분한 일본군은 일방적으로 상하이를 점령하는 상하이 사변(1932)을 일으켰다. 비록 의거는 실패하였지만,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을 주었고 일제에게는 두려움을 안겨 주었다.

(3) 윤봉길 의거(1932. 4)

상하이 사변으로 상하이에 새로운 침략 기지를 마련한 일제는 홍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 및 전승 기념 축하식을 거행하자, 한인 애국 단원 윤봉길은 식장에 폭탄을 던져 많은 일본군 장성과 고관들을 살상하였다. 이 의거는 국제적으로 큰 관심사가 되어 한국 독립운동의 의기를 드높였으며, 특히 한국의 독립운동에 냉담하던 중국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 윤봉길(1908~1932) 의거의 결과

중국의 국민당 정부 장제스는 중국의 1억 인구가 해내지 못한 일을 한국의 한 청년이 해내었다고 감탄하였으며, 이후 대한민국 임시 정부를 인정하고 지원을 강화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중국 정부가 중국 영토 내에서 우리 민족의 무장 독립 활동을 승인함으로써 나중에 한국 광복군 탄생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윤봉길 의거는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도 시련을 주어, 임시 정부는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점차 중국 내지로 이동하게 되었다.
항일 단체 애국 지사 연도  
의열단 김익상 1921 조선 총독부 포탄 투척
김상옥 1923 종로 경찰서 포탄 투척
김지섭 1924 일본 동경 궁성 포탄 투척
나석주 1926 식산 은행과 동양 척식 주식회사 포탄 투척
한인 애국단 조명하 1928 타이중 의거 → 타이완에서 일본 국왕 장인을 죽임
이봉창 1932 ◈ 도쿄에서 일본 국왕에 폭탄 투척
◈ 일제가 상하이 사변을 일으키는 계기
윤봉길 1932 ◈ 상하이 홍커우 공원 폭탄 투척 → 한 · 중 연합의 계기
◈ 중국 장제스가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지원 강화 계기 마련
노인단 강우규 1919 3대 사이토 총독에 포탄 투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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