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 · 중 연합 작전 전개
ㄱ. 배경
1931년에 만주 사변을 일으킨 일제가 이듬해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하고 수탈을 강화하자, 만주 지역에서 일제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공동의 적이 되었다. 이에 만주의 독립군 부대는 반일 감정이 높아진 중국인 부대와 연합하여 반일이라는 공동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대일 항전을 추진하였다. 이 무렵 만주에서는 3부 통합 운동의 결과로 조선 혁명당과 한국 독립당이 결성되었고, 그 산하에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인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이 편성되었다.
○ 만주 사변(1931) 일제가 만보산 사건을 배후 조종하고 만주 사변을 일으킨 후 부의를 맹주로 하는 만주 제국을 건설하여 중국 동북 지방(만주)을 점령한 사건이다. 이를 계기로 중국 내에서 항일 감정이 고조되어 각지에서 항일군이 봉기하였다. 우리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
ㄴ. 중국군과 연합한 독립군 부대
(1) 한국 독립군
북만주에서는 지청천이 인솔하는 한국 독립군이 중국의 호로군과 연합하여, 쌍성보 전투(1932), 경박호 전투(1932), 사도하자 전투(1933), 동경성 전투(1933), 대전자령 전투(1933)에서 일 · 만 연합 부대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특히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4시간의 격전 끝에 승리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여 한 · 중 연합 부대의 사기를 크게 높였다.
(2) 조선 혁명군
남만주에서는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 혁명군이 중국의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 전투(1932), 흥경성 전투(1933), 등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1934년에 양세봉이 일제에 의해 살해되고, 간부들이 체포 · 처형 당하면서 점차 세력이 약화되었다.
ㄷ. 한 · 중 연합 작전의 중단
1930년대 중반 일제의 공격이 거세지는 상황에서 투쟁 방법과 주도권을 둘러싸고 한 · 중 사이에 갈등이 일어나 점차 중국과의 협력이 어려워졌다. 이때 임시 정부가 직할 군단 편성을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의 이동을 요청하자 대부분의 독립군들은 만주를 떠나 중국 관내로 이동하였다. 특히, 한국 광복군의 지청천은 임시 정부가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데 중심 역할을 하였다.
2. 만주 지역의 항일 유격 투쟁
ㄱ. 사회주의 사상 확산
소련과 인접해 있는 만주 지방에서는 1920년대 초부터 사회주의 사상이 전파되었다. 만주 지역의 사회주의자들은 우리 농민들의 의식을 변화시키며 소작료 인하, 영구 소작권 요구 등을 내세워 빠르게 세력을 확장시켰다. 이에 일제가 만주를 침략한 1931년부터 사회주의자들과 농민들은 반일적인 중국인과 함께 소작료 인하 등을 내걸고 지주와 군벌에 맞서 투쟁하였다.
ㄴ. 항일 유격대 창설
간도 지역의 사회주의자들과 농민들은 일제의 만주 침략 직후인 1931년 가을 추수 투쟁과 1932년 봄 춘황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러한 가운데 북간도 연길현에서 경찰서의 무기를 탈취하면서 무장 유격대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졌다. 이후 북간도의 왕청, 화룡, 훈춘현과 서간도 지역에서도 항일 유격대가 창설되었다.
ㄷ. 동북 인민 혁명군
(1) 동북 인민 혁명군 조직(1933. 9)
이와 같이 수많은 독립군이 중국 본토로 이동한 후에도 만주 지역의 조선인과 중국인들은 항일 무장 투쟁을 계속하였다. 중국 공산당은 만주 지역 한인 유격대와 중국 공산당 유격대를 중심으로 동북 인민 혁명군을 결성하였다. 이에 만주의 한인 사회주의잗들은 동북 인민 혁명군에 합류하여 항일 전쟁에 참여하였다. 동북 인민 혁명군은 만주 지역에 인민 혁명 자치 정부를 세우고 토지 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국내 진입 작전도 벌였다.
(2) 동북 인민 혁명군 개편(1936)
중국 공산당이 만주 지역의 한국인 유격대원 중 일본이 첩자가 있다는 이유로 1932년부터 1936년까지 500여 명의 한국인 유격대원을 살해하는 민생단 사건을 일으켰다. 일제의 본격적인 대토벌 작전과 중국 공산당이 조선인 항일 혁명가를 숙청함에 따라 활동이 위축된 동북 인민 혁명군은 항일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반일 무장 부대와 연합하여 동북 항일 연군으로 개편하였다.
ㄹ. 동북 항일 연군(1936)
(1) 항일 유격 투쟁 전개
일제에 반대하는 사람은 사상이나 노선, 민족에 관계없이 단결하자는 가치에 따라 편성된 동북 항일 연군을 중심으로 한 · 중 두 민족이 연대하여 항일 유격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2) 조국 광복회 조직(1936)
동북 항일 연군 내의 한인 유격대는 국내 진출을 적극 도모하면서 이념과 민족을 초월하여 민족적 단결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리고 민족주의 계열의 무장 단체였던 조선 혁명군과 연합을 추진하는 한편, 국내 함경도 일대의 공산주의 세력과 천도교도 등 민족주의 세력까지 통합하여 조국 광복회를 조직하였다. 함경도 일대에서 조직을 확대한 조국 광복회는 보천보 전투(1937) 등 국내 진공 작전을 여러 차례 단행하여 경찰 주재소와 면사무소 등을 파괴하였다.
(3) 동북 항일 연군의 와해
조국 광복회 조직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1939년부터 시작된 일제의 대토벌 작전으로 큰 타격을 받은 동북 항일 연군은 소부대 중심의 유격 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하였고, 일부는 소련령인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겨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소련군의 일원으로 항일 운동을 지속하다가 광복 이후 소련군을 따라 국내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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