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봉오동 전투(1920. 6)와 청산리 대첩(1920. 10)

후니 NO.1 2022. 5. 26. 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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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독립군의 무장 독립 전쟁

ㄱ. 배경

(1) 무장 투쟁 선회

3 · 1 운동 당시 일제의 무자비한 탄압이 있은 후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 비폭력 항일 운동의 방식을 지양하고 조직적인 무장 독립 전쟁을 전개하였다.

(2) 무장 항전 준비

3 · 1 운동을 계기로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은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고 동포들이 제공한 자금을 바탕으로 무기를 구입하여 항전을 준비하였다.

ㄴ. 무장 독립군의 활동

(1) 국내 진공 작전

독립군은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평안도와 함경도 일대의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고 추격해 오는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군자금을 보금하거나 친일파를 숙청하기도 하였다.

(2) 독립군의 세력 강화

이와 같은 독립군의 활동은 국내의 청년들을 고무시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합세하였고, 대한 제국 시기의 의병들도 여기에 가담하여 독립군의 군세는 나날이 강성해갔다.

ㄷ. 대표적 독립군 부대

(1) 만주

3 · 1 운동 이후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가 조직되었고, 가장 활발하게 무장 독립군이 활동하였다.

㉠ 서간도 지역

이회영 등 신간회 간부들이 신흥 무관 학교를 설립하고 지청천을 교관으로 영입하여 수많은 독립군을 양성하였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서로 군정서라는 독립군 조직을 결성하였다. 또한,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속의 광복군 사령부와 뒤를 이은 광복군 총령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박장호, 조맹선 등 의병장 출신들과 유림 지도자들은 대한 독립단을 조직하였다.

㉡ 북간도 지역

한인 기독교 인사들의 자치 단체인 대한 국민회는 연해주의 대한 국민 회의와 손잡고,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을 지원하였으며, 독자적인 군사 활동을 위해 대한 국민회군을 조직하였다. 대종교는 서일과 김좌진을 지도자로 하여 중광단을 주축으로 북로 군정서를 조직하고 사관 연성소를 운영하였다.

(2) 연해주

신민단, 혈성단, 경비대 등이 조직되었다.

(3) 미국

국민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ㄹ. 봉오동 전투(1920. 6)

(1) 배경

1920년 6월 두만강 북쪽의 삼둔자에서 박승길이 이끄는 신민단이 일본군과 교전을 벌인 후 화룡현 봉오동 방면으로 이동하였다. 그동안 독립군의 빈번한 국내 진입 작전에 시달리던 일본군은 1개 대대 병력을 편성하여 신민단을 추격해 왔다.

(2) 독립군 연합 부대 편성

당시 봉오동에 있던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군 등은 연합 부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하였다. 독립군 연합 부대는 봉오동 주변에 매복하고 있다가 추격해 오고 있는 일본군을 기습 공격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3) 결과

봉오동 전투에서 일본군은 157명이 사살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는데 비하여 독립군 전사자는 4명 뿐이었다. 이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과 벌인 대규모 전투에서 거둔 승리 하여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가와 동포들이 사기가 크게 앙양되었고, 독립군의 군세가 더욱 증강되는 계기가 되었다.

ㅁ. 청산리 대첩(1920. 10)

(1) 배경

봉오동 전투에서 대패한 일제는 만주 지역의 독립군을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일본군 동원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만주의 군벌과 중 · 일 합동 수색대를 편성하여 일본군이 독립군과 항일 단체를 수색하였다. 북간도 지역의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국민회군 등 독립군 부대는 일본군의 계획을 미리 탐지하고, 1920년 9월부터 본거지를 떠나 화룡현과 안도현 일대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2) 경과

일제는 훈춘 사건을 날조하여 출병의 명분을 만들고, 우리나라에 주둔하던 19사단, 시베리아 파견군, 관동군 등 미리 준비한 2만여 명의 토벌 군대를 동원하여 만주의 독립군을 압박해 왔다. 김좌진의 북로 군정서 군과 홍범도의 대한 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 부대들이 충동을 피해 백두산 근처 청산리 부근을 이동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포위망을 좁혀왔다. 일전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독립군 연합 부대는 청산리 일대의 유리한 지대를 선점하여 일본군에 일대 반격을 가하였다.

○ 훈춘 사건

일제에 매수당한 마적들이 훈춘을 공격하여 살인 · 약탈을 자행하고 일본 영사관에 불을 지른 사건이다. 일제는 이를 독립군의 소행이라 주장하면서 대규모 군대의 만주 출병 명분으로 삼고, 중국 당국에 연락하지도 않고 토벌대를 만주 지역에 투입하였다(1920. 10).

(3) 전적

김좌진이 이끄는 북로 군정서군과 독립군 연합 부대는 지형을 적절히 활용한 작전과 굳건한 의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첫 전투인 백운평 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 전투, 천수평 · 어랑촌 전투, 맹개골 · 만기구 전투, 천보산 전투, 고하동 전투 등 10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일본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4) 결과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일본군의 피해는 사망 1,200명, 부상 2,100명이라고 할 만큼 청산리 대첩은 독립 전쟁사에서 가장 빛나는 승리였다. 청산리 대첩으로 독립군은 일제의 공격을 저지할 수 있었으며, 우리 민족에게 독립을 쟁취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 북로 군정서

1911년 북간도 왕청현에서 대종교들이 중심이 되어 항일 단체인 중광단을 조직하였다. 이 단체는 1919년 임시 정부 군무부 산하의 북로 군정서로 개편되고 서일을 총재로, 김좌진을 부사령관으로 삼아 본격적인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사관 연성소를 설립하여 독립군을 훈련하고 사관을 양성하는 한편, 군비와 무기 확충에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0년 8월에는 총병력 1,600여 명, 장총 1,800정, 기관포 7문, 대포 3문 등을 갖춘 동북 만주 최강의 독립군 부대로 발전하였다.
☆ 청산리 대첩

1. 청산리 대첩 승리 후 북로 군정서에서 임시 정부에 보고한 승리 요인
→ 생명을 돌보지 않고 용전 분투하는 독립에 대한 군인 정신이 먼저 적의 심리를 압도한 것
→ 양호한 진지를 미리 점거하고 완전한 준비를 하여 사격 성능을 극도로 발휘한 것
→ 임기 응변의 전술과 예민 신속한 활동이 모두 적의 의표에서 벗어나서 뛰어난 것
2. 청산리 대첩의 전과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발표에 의하면 사망 1,254명, 부상 2,100명 이라고 하고 있으며, 박은식의 '한국 독립 운동지혈사'에서는 사상자를 2,000여 명, 또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은 그의 회고록 『우둥불』에서 일본군 사상자를 3,300여 명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3. 청산리 대첩 당시 군가
→ 하늘은 미워한다. 배달족의 자유를 억탈하는 왜적들은 삼천리 강산에 열혈이 끊어 분연히 일어나는 우리 독립군
→ 백두의 찬 바람은 불어 거칠고 압록강 얼음 위에 은월이 밝아 고구에서 불어오는 피비린 바람 갚고야 말 것이다 골수에 맺힌 한을
→ 하느님 저희들 이후에도 천만대 후손의 행복을 위해 이 한 몸 깨끗이 바치겠으니 빛나는 전사를 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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