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간도 참변(경신참변, 1920)
ㄱ. 배경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에서 대패한 보복으로 일제는 1920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독립군 기지 기반을 무너뜨리기 위해 간도의 한인 마을에 들어가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서 사는 한국인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마을을 초토화시켰다.
ㄴ. 피해
독립군의 근거지를 없앤다는 명분으로 일본군은 간도 일대에서 동포 1만여 명을 무차별 학살하고, 민가 2,500여 채와 학교 30여 채를 불태웠다.
2. 대한 독립 군단(1921. 4)
ㄱ. 결성
독립군의 거듭된 승리로 사기가 충천해 있던 만주의 한민족에 대해 일본군은 한인촌에 대한 대량 학살과 방화, 약탈, 파괴를 자행하고 독립군을 토벌하려는 간도 참변을 일으키자 독립군 부대들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 · 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독립군은 서일을 총채, 홍범도와 김좌진을 부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장기 항전을 준비하기 위해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ㄴ. 자유시 참변(1921. 6)
대한 독립군단은 그 곳에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는 러시아 혁명 군대인 적색 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시베리아의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 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 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가 발생하였다. 이를 계기로 일부 독립군은 연해주에 남았고, 일부는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 자유시 참변 당시 시베리아 자유시에서는 적색군(소련군)과 백색군(반혁명군)의 내전이 한참이었고, 러시아 혁명을 봉쇄하려는 미국과 일본이 백색군을 지원하면서 일본군이 출병해 있는 상태였다. 자유시로 이동한 독립군은 출병한 일본군이 백색군을 지원함에 따라 적색군을 도왔다. 그러나 승리한 적색군은 일본과 마찰을 우려하여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충돌이 일어나 많은 독립군이 희생당하였다. |
3. 독립군의 재정비
ㄱ. 조직 재건 착수
적색군의 배신으로 와해된 독립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만주로 이동하여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역량을 강화한 다음 곳곳에서 자치 단체를 결성하였다.
ㄴ. 통합 운동으로 전개
자유시 참변 후 다시 만주로 돌아온 독립군들은 무장 독립 전쟁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1922년부터 독립군 단체의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만주에서 다양하게 존재했던 독립군과 항일 단체들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통합되었다.
(1) 참의부(1923)
백광운, 최석순 등이 압록강 건너편 지역에 대한민국 임시 정부 직할 부대인 육군 주만 참의부를 조직하여, 지안을 중심으로 동포 사회를 관할하면서 국내 진공 작전도 활발히 전개하였다.
(2) 정의부(1925)
오동진과 지청천 등이 지린과 펑톈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에서 정의부를 조직하여, 동포 사회를 관할하는 군정부로 발전하였다.
(3) 신민부(1925)
김좌진 등이 북만주 일대에서 자유시 참변 이후 소현 영토에서 탈출한 북로 군정서 계열의 독립군을 중심으로 신민부를 조직하여, 동포 사회를 관할하였다.
ㄷ. 3부의 성격
(1) 민정 조직과 군정 조직
3부는 각각 그곳 동포 사회의 자치 행정을 맡아보는 민정 조직과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는 군정 기관도 설치하였다. 또한, 자체의 무장 독립군도 편성하여 한 · 만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2) 공화제 정부
3부는 동포 사회에서 임원을 선출하여 행정 · 입법 · 사법부를 구성하고, 세금을 거두어 정부를 운영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3부는 사실상 만주 동포 사회를 셋으로 나누어 이끈 공화주의적 자치 정부였다.
4. 미쓰야 협정(1925. 6. 11)
간도에 진출한 일제가 독립군을 탄압하기 위하여 만주의 군벌 장쭤린과 총독부 마쓰야 사이에 맺어진 협정으로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 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 협정으로 인해 독립군은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 미쓰야 협정 내용(1925. 6. 11) 1. 한국인의 무기 휴대와 한국 내 침입을 엄금하며, 위반자는 검거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2. 재만 한인 단체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며,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 3. 일제가 지명하는 독립 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4. 한국인 취체의 실황을 상호 통보한다. |
5. 3부의 통합 운동
ㄱ. 배경
사상과 이념의 차이를 넘어 하나의 독립 운동 정당으로 단결하여 투쟁하자는 민족 유일당 운동이 1926년 북경에서 시작되었다. 이 운동은 국내를 비롯한 만주에도 전파되었다. 이에 만주 지역에서도 3부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 남만주에서는 전 민족 유일당 조직 협의회가, 북만주에서는 전 민족 유일당 조직 촉성회가 성립되어 정의부 주도하에 길림 등지에서 몇 차례 통합 회의가 열렸다(1928).
ㄴ. 결과
그러나 유일당 결성 방안에 대한 의견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격렬되고 말았다. 이로써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의 완전한 통합 운동은 좌절되고, 우여곡절 속에 3부는 국민부와 혁신 의회의 양대 세력으로 제편되었다.
6. 국민부와 혁신 의회
ㄱ. 국민부
남만주 지역에서는 정의부 주력파와 참의부 · 신민부의 일부 인사들이 통합하여 국민부(1929)를 결성하였다. 국민부는 남만주 한인의 자치 기관의 업무만을 담당하고, 정당의 성격을 띤 조선 혁명당을 결성하고, 그 아래에 무장 독립 군사 조직으로 조선 혁명군을 편성하여 남만주 일대를 관할하는 군정부로 활동하였다.
ㄴ. 혁신 회의
북만주 지역에서는 신민부의 군정파와 정의부 · 참의부의 일부 인사들이 합쳐 혁신 의회(1928)를 조직하였다. 혁신 의회는 군정부를 조직하지 못한 채 해체된 이후 지청천, 신숙 등에 의해 한국 독립당으로 개편되고, 그 아래에 한국 독립군을 조직하여 일제가 만주를 침략하자 항전하였다.
7. 조선 혁명군과 한국 독립군
ㄱ. 항일 독립 전쟁 주도
이리하여 1930년대 초반 만주에서 활동하던 다수의 독립군은 한국 독립군과 조선 혁명군으로 재편되었고, 만주의 항일 독립 전쟁은 이 두 단체가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ㄴ. 중국군과의 연합 작전
이와 같이 1930년대 초 만주에서의 무장 독립 전쟁은 남만주 지역에서는 조선 혁명군이, 북만주 지역에서는 한국 독립군이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이들 부대는 일제의 만주 침략 이후에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였다.
'한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의열단과 한일 애국단 (0) | 2022.05.31 |
---|---|
만주 사변(1931)과 국외 민족 운동 (0) | 2022.05.28 |
봉오동 전투(1920. 6)와 청산리 대첩(1920. 10) (0) | 2022.05.26 |
광주 학생 항일 운동(1929)과 국내 무장 항일 투쟁 (0) | 2022.05.25 |
항일 운동(신간회) (0) | 2022.05.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