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을미 개혁과 을미 의병

후니 NO.1 2022. 4. 22. 18:28
반응형

1. 을미개혁

ㄱ. 삼국간섭

(1) 일본의 청 · 일 전쟁 승리

조선에서 갑오개혁이 진행되는 가운데 청 · 일 전쟁은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그 결과 시모노세키 조약(1895)이 체결되었다. 이를 통해 일본은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를 나누어 받았다.

(2) 랴오둥 반도 점령 저지

일찍부터 한반도와 랴오둥 반도에 관심을 가지고 남하 정책을 추진하던 러시아가 일본의 팽창을 견제하기 위하여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여 일본이 청 · 일 전쟁에서 승리하여 얻은 랴오둥 반도를 포기하도록 하였다.

(3) 결과

일본은 이에 굴복하여 청에 요동반도를 반환하였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세력은 위축되어 제3 차 김홍집 내각(친러 내각)이 구성되는 여건을 조성하였다.

ㄴ. 을미사변(1895)

(1) 친러 정책

삼국 간섭이 일어나자 일본의 힘이 유럽 열강에 비해 약하다고 생각한 고종과 명성 황후는 러시아와 미국의 힘을 빌려 일본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다. 갑오개혁을 주도하던 박영효가 역모로 몰려 실각하고 일본으로 다시 망명하자, 친일 관료들이 권력에서 밀려나고 이완용, 이윤용 등 친미 · 친러적인 관료들이 등장하였다.

(2) 제 3 차 김홍집 내각(친러 내각)

박영효가 명성 황후 폐위 음모에 휘말려 일본으로 망명한 후, 명성 황후는 이범진 · 이완용 등 러시아와 가까운 인물들을 등용하여 온건 개화파와 친러파의 연립 내각인 제3 차 김홍집 내각을 구성하였다. 이처럼 성립된 제3 차 김홍집 내각에서 친러파가 우세하자, 명성 황후는 친러파와 손을 잡고 배일 정책을 주도하였다.

(3) 명성 황후 시해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예비역 육균 중장 미우라 고로를 주한 공사로 파견하여 약화되어 가는 세력을 만회하려고 하였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을 배척하려는 세력의 핵심이 명성 황후라고 생각한 미우라 공사는 새벽에 일본군 수비대와 일본 낭인들을 경복궁에 난입시켰다. 그리고 옥호루에서 한 나라의 국모인 명성 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1895).

ㄷ. 제 3 차 갑오개혁(을미개혁 : 1895. 8. 24 ~ 1896. 2)

(1) 제 4 차 김홍집 내각

명성 황후 시해 사건 후 개화파 정부는 친러파를 축출하고 김홍집 · 유길준 등을 중심으로 한 제4 차 김홍집 내각(친일 내각)을 성립시켜, 일본의 간섭을 받으며 개혁 사업을 다시 추진하였다. 그러나 개혁이 급진적으로 추진되면서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반발도 커졌다. 또한, 명성 황후 시해에 대해 항의하지 못하고 폐비시키는 조칙을 발표하여 역시 국민들의 반발을 조래 하였다.

(2) 을미개혁의 내용

㉠ 단발령 실시

김홍집 내각이 단발령을 내리자 을미사변으로 격앙되어 있던 유생층과 농민들은 각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본군과 친일 지방관을 공격하였다. 유생들은 단발령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고, 최익현은 "내 목을 자를지언정 내 머리카락은 자를 수 없다."는 강경한 자세로 반발하였다.

㉡ 군제 개편

중앙군을 친위대로, 지방 군을 진위대로 개편하였다.

㉢ 연호 사용

양력으로 세운다는  뜻을 지닌 건양이라는 연호를 1896년부터 사용하였다.

㉣ 기타 내용

태양력의 사용, 소학교의 설립, 우편 제도의 실시, 종두법의 전국적 시행 등을 추진하였다.

(3) 개혁의 중단

의병 진압을 위하여 친일 내각 산하의 친위대가 지방으로 출동하자, 이를 틈타 고종은 신변의 안전을 꾀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피하는 아관 파천을 단행하였다(1896. 2). 그러자 성난 군중들이 김홍집, 어윤중 등 개혁을 주도한 세력을 처단하고, 일부 친일 관료가 망명하면서 갑오 · 을미개혁은 중단되었다.

 

2. 아관 파천(1896 ~ 1897)

ㄱ. 고종의 신변 위협

일본의 침략과 급진적인 갑오 · 을미개혁의 실시로 대부분의 국민 사이에 반일 정서가 확산되었다. 또한, 고종은 왕권을 제약하려는 개화 세력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을미사변 후에는 신변의 위협까지 느끼게 되었다. 이에,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하였다.

ㄴ. 아관 파천의 결과

(1) 을미개혁의 중단

을미개혁을 추진하던 개화파 정부(제4 차 김홍집의 친일 내각)가 무너졌다.

(2) 친러 내각의 성립

이완용, 이범진, 윤치호 등이 친러 내각을 구성하여 국가의 자주성은 손상되었다.

(3) 열강의 이권 침탈 격화

일본의 침략 세력은 일단 견제되었으나, 러시아를 비롯한 열강들이 철도 부설권, 광산 채굴권, 삼림 채벌권 등의 이권 침탈이 심해졌다.

 

3. 갑오 · 을미개혁의 성격

ㄱ. 갑오 · 을미개혁의 의의

(1) 자주적 개혁

갑오 · 을미개혁은 대외적으로 일본의 조선 침략 정책에 의해 강요된 것이었으나, 여러 가지 근대적인 제도를 수용하여 조선을 근대 국가 체제로 발전시키려 한 자주적 개혁 운동이었다.

(2) 근대적 개혁

봉건적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했던 개화파들의 의지와 사회 변혁을 추구하던 동학 농민군의 요구가 반영되어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으로 근대 국가로 나아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3) 새로운 정치 체제 시도

갑신정변과 동학 농민 운동 당시의 요구를 어느 정도 수용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차별적 신분 제도를 폐지하고 평등 사회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또한 왕권을 제한하고 내각 중심의 정치를 실시함으로써 전제 군주제를 극복하는 새로운  정치 체제를 시도하였다. 이로써 근대적 사회로 나아갈 수 있는 제도적 토대가 마련되었다.

(4) 민권 및 국권 수호 운동의 기반

갑오 · 을미개혁 때 만들어진 근대적 제도의 골격은 대한 제국 때까지 유지되면서 독립 협회와 애국 계몽 운동과 같은 민권 및 국권 수호 운동이 전개되는 기반이 되었다.

ㄴ. 갑오 · 을미개혁의 한계

(1) 민중의 외면

개혁 주도 세력이 일본의 무력에 의존함에 따라 일본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었고, 개혁 추진 세력이 일본에 많은 이권을 넘겨주어 국민의 반발을 초래하였다. 게다가 개혁의 내용이 지배층의 입장에서 추진되었기에 민중의 지지를 얻어내지 못하였다.

(2) 국방 제도와 토지 제도 개혁 미흡

자주적 근대 국가의 기반을 구축하는데 필수적인 국방력 강화는 미흡했고, 농민이 요구한 토지 제도의 개혁과 상공업의 진흥과 같은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 을미의병(1895)

ㄱ. 배경

청 · 일 전쟁의 결과 한반도에서 청 세력을 몰아낸 일본이 침략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민족적 저항이 여러 방면에서 일어났다. 그중 가장 적극적인 저항이 의병 투쟁이었다.

ㄴ. 계기

일본군이 경복궁 점령 후부터 전개되었던 의병 투쟁은 명성 황후 시해 사건에 대한 국민적 분노가 채 가시기도 전에 정부가 단발령을 공포하자, 전국의 유생과 농민은 이에 항거하여 곳곳에서 최초의 항일 의병인 을미의병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ㄷ. 활동

을미의병의 주도 세력은 위정척사 사상을 가진 보수적 유생층이 주도하였다. 이들은 단발령을 비롯한 개화 정책이 우리 민족의 전통 유교 윤리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 오랑캐나 짐승의 처지로 전락시키는 것이라고 판단하여 의병을 일으켜 이를 막고자 하였다. 제천 · 춘천의 유인석과 이소응, 홍주의 김복한, 전남 구례의 고광순 등 보수적 양반층 유생들이 먼저 의병을 일으키자, 반일 · 반침략을 외치던 일반 농민들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들이 이에 적극 가세하였다. 이들은 지방 관청이나 일본군을 공격하고, 개화파 친일 관리들을 처단하였다.

ㄹ. 해산

양반 유생 의병장들의 신분 차별 의식으로 인해 결집이 되지 못해 전력이 취약했으며, 아관 파천을 계기로 친일적인 내각이 무너지고, 고정이 단발령을 취소하면서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을 내리자, 유생 출신인 의병장들은 대부분 부대를 해산하였다.

ㅁ. 계승

동학 농민 운동이나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빈농, 영세 상인, 유민, 걸인 등은 무장 결사를 조직하여 반봉건 · 반침략 투쟁을 계속하였는데, 그 대표적 조직이 활빈당이었다.

반응형

'한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립 협회 2  (0) 2022.04.25
독립협회 1  (0) 2022.04.24
갑오개혁 2  (0) 2022.04.21
갑오개혁 1  (0) 2022.04.20
동학 농민 운동 4  (0) 2022.04.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