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 정세
ㄱ. 청 · 일의 대립 격화
개항 이래 조선을 둘러싸고 전개된 열강의 정치적 · 경제적 · 군사적 침략 경쟁은 갑신정변 이후에 더욱 가열되어, 청국과 일본 간의 침략적 대립은 격화되었고, 러시아와 영국까지도 조선 문제로 충돌하였다.
ㄴ. 청의 정치 · 경제적 간섭 강화
(1) 정치적 간섭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고 서울에 다시 돌아온 청의 위안스카이는 조선으 청의 속방으로 만들기 위해 조선의 내정과 외교에 간섭하고, 일본과 서구 열강의 침투를 견제하였다.
(2) 경제적 침투
위안스카이의 보호 아래 청 상인들은 서울과 지방을 휩쓸며 이득을 취하였고, 서울 한복판에 중국 상가를 조성하여 장사를 하였다.
ㄷ. 외교 고문 교체
청은 독일인 묄렌도르프를 외교 고문으로 추대하였으나, 그가 고종에게 러시아와 가까이할 것을 권유하자 외교 고문을 미국인 데니로 바꾸었다. 데니 역시 청의 속방론을 비판하여 친러 정책을 권유하자, 위안스카이는 친러 정책으로 기울어진 고종을 폐위시키려는 계획까지 세우기도 하였다.
ㄹ. 조선 정부의 대응
이러한 상황에서 고종을 비롯한 조선의 집권 세력은 불만을 품기 시작 하였고, 더욱 심해진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종은 다각도의 외교 정책을 추진하였다. 조선 정부는 미국과의 우호를 강화하려고 하였으나, 미국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러시아를 끌어들이고자 하였다. 이를 계기로 조선 정부 내에는 친러 세력이 늘어났다.
ㅁ. 러시아의 남하
(1) 조 · 러 수호 통상 조약
갑신정변 이전부터 고종은 청과 일본의 대립 구도 속에서 위기 의식을 느끼고, 이러한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묄렌도르프를 통하여 러시아 측과 교섭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베이징 조약(1860)으로 연해주를 차지하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군항을 개설하여 조선으로의 진출을 꾀하던 러시아는 임오군란 이후 청을 견제하기 위해 조선과 조 · 러 수호 통상 조약을 맺었다(1884). 이로써 러시아는 함경북도 경흥에 조차지를 얻고, 베베르를 조선 공사로 파견하여 조정에 친러 세력을 확장해 갔다.
(2) 조 · 러 육로 통상 조약
베베르는 당시 청의 과도한 내정 간섭으로 반청 경향을 보이던 조선 정부에 접근하여 1888년 조 · 러 육로 통상 조약을 맺어 두만강 운항권과 양국의 무역의 자유와 경흥을 무역지로 개방하는 등의 외교적 능력을 발휘하였다.
ㅂ. 거문도 사건(1885~1887)
(1) 배경
갑신정변 이후 고종은 청의 지나친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려고 러시아와 외교 관계를 강화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 정부가 러시아에 영흥만을 조차해 주는 대가로 조선에 군사 훈련을 담당할 군사 교관을 파견한다는 내용의 조 · 러 비밀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을 접하였다.
(2) 영국의 거문도 점령
특히, 세계 곳곳에서 러시아와 대립하던 영국은 조 · 러 밀약설에 대해 가장 긴장하였다. 이에 영국은 러시아의 남하를 견제한다는 구실로 아무런 통보 없이 거문도를 불법으로 점령(1885)하였다. 거문도는 대한 해협의 문호에 위치한 섬으로 한 · 일 양국의 해상 통로는 물론 러시아의 태평양 진출의 요충지로도 손색이 없었다. 영국은 거문도를 해밀턴 항이라 부르며 영국기를 게양하고 포대를 쌓아 요새화함으로써 조선을 둘러싼 국제 분쟁을 가열시켰다.
(3) 영국군의 철수
조선 정부는 영국군의 주권 침해에 강력하게 항의하며, 각국 공사들에게 서신을 보내 조정을 요청하였다. 영국은 청 · 일본 · 러시아 등이 강력하게 반발하자, 이들 나라들로부터 조선을 점령하지 않는다는 확약을 받은 후, 러시아와 일본의 파병을 두려워한 청의 중재로 2년 뒤인 1887년에 거문도에서 군대를 철수하였다.
ㅅ. 중립론의 대두
(1) 배경
갑신정변 이후 청과 일본, 그리고 서구 열강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치열하게 경쟁하자, 국내외 인사들 중에는 조선을 중립국으로 만들자는 의견을 제시하는 사람도 있었다. 중립론은 실현되지 못하였지만, 당시 조선을 둘러싼 국제 정세의 긴박한 사정을 입증해 주는 것이었다.
(2) 부들러
조선 주재 독일 부영사 부들러는 조선이 청 · 일 양국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조선을 스위스와 같은 영세 중립국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정부에 건의하였으나, 조선 정부는 그다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 유길준(1856~1914)
미국 유학 후 견문을 넓히고 귀국한 유길준도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안전을 보장받기 위해 한반도 중립화론을 구상하였다. 유길준은 조선의 안정이 어느 특정한 강대국의 보장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강대국 모두가 보장하는 중립화를 이룰 때 가능하다고 보았다. 조선을 중립화하는 것만이 조선의 자주독립을 지키고 러시아를 막는 방책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갑신정변 실패 이후 급진 개화파로 몰리면서 감옥에 수감되어 중립화론은 공표되지 못하였다.
2. 조선 정부의 대응
ㄱ. 부국강병 추구
갑신정변 이후 정부의 개화 정책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고 청의 내정 간섭은 더욱 강화되어 청은 조선에 대한 실질적인 지배권을 확립하였다. 고종과 집권층은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나라의 자주독립과 왕권 신장을 위해서는 청의 간섭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왕권을 강화하고, 부국강병을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방안을 모색하였다.
ㄴ. 근대 문물의 수용
박문국을 재건하여 폐간되었던 한성순보를 한성주보로 복간하여 국내의 정세와 지식을 널리 알렸고, 근대 학문과 외국어를 교육하는 육영 공원, 서양식으로 군사를 훈련시키고 사관을 양성하는 연무 공원, 광산을 개발하는 광무국, 근대적 전신을 가설하기 위한 전보국 등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선진 기술을 도입하기 위해 근대적 지식과 경험을 갖춘 외국인 고문과 기술자를 초빙하기도 하였다.
ㄷ. 외교의 다변화
정부는 외교의 다변호를 통해 열강끼리 서로 견제하도록 하였다. 고종은 청을 견제하기 위해 1885년에 러시아와 밀약을 맺으려하였다. 이에 청은 반청적인 경향을 보이는 고종과 민씨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청에 잡혀 있던 흥선 대원군을 환국시키고,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룰 간섭하고 청 상인의 활동을 비호하도록 하였다. 이에 맞서 고종은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청을 견제하려고 하였고, 일본과 미국에 공사관을 개설하여 조선이 청의 속국이 아니고 독립국임을 과시하였다. 특히, 주미 공사관은 서양 국가에 설치된 최초의 상주 공사관으로, 서구 문물을 적극 수용하는 발판이 되었다.
ㄹ. 초대 주미 공사 박정양의 노력
조선 정부는 박정양으 초대 주미 공사로 파견하여 미국과의 관계를 강화하였다. 박정양은 조선이 자주 독립 국가임을 과시하고, 미국 · 프랑스로부터 산업 개발과 재정 궁핍 타개를 위한 차관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청의 압력 때문에 박정양이 소환 당하는 어려움을 격기도 하였다.
ㅁ. 결과
그러나 정부가 추진한 개화 정책과 자주적 외교 정책은 청의 지나친 간섭과 외세의 경제 침탈, 집권 세력의 무능과 부패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지배층의 수탈과 외세의 경제 침탈이 가속화되었고 농민들의 불만은 점점 커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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