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갑신정변 1편

후니 NO.1 2022. 4. 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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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화당의 형성과 갈등

 

ㄱ. 개화파의 형성

(1) 정치 세력화

개화 사상의 선각자인 박규수, 오경석, 유홍기 등으로부터 지도를 받은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등이 개항을 전후해 점차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여 개화파를 이루었다.

(2) 정계 진출

개화파는 개항 이후 1880년대에 들어 정계에 진출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적극 뒷받침하고 개혁 운동을 추진하였다.

 

ㄴ. 개화파의 두 흐름

(1) 개화파의 분화 원인

1882년 임오군란이 진압된 후 개화에 반대하던 대원군 중심의 정치세력은 약화되었다. 이때 청은 조선에 군대를 계속 주둔시키면서 조선을 속국으로 지배하려고 내정 간섭을 강화하였다. 당시 민씨 세력은 청에 더욱 의지하며 친청 정책을 펼칠뿐, 개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서양 문물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바탕으로 개항 이후 정부의 개화 정책에 적극 참여하였던 개화 세력은 정부의 개화 정책 방향과 친청 외교 정책을 둘러싸고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나뉘었다.

(2) 온건 개화파(사대당)

㉠ 점진적 개화 주장

당시 집권 세력의 중심을 이루며 정부의 개화 정책을 주도하던 민씨 척족들과 김홍집 · 어윤중 · 김윤식 등 대표적이 정치가들은 민씨 정권과 타협하여 전통적인 유교 사상을 지키면서, 서양의 과학 기술만을 받아들여 사회를 점진적으로 개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동도서기론

이들은 우리의 제도와 사상을 지키며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이자는 동도서기론에 입각해 청의 양무운동을 모델로 삼았다. 즉, 서양의 종교를 금지하고 유교 도덕과 정치제도를 지켜 나가면서 서양의 발달된 기술만 받아들여도 충분히 부국강병을 이룩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 청과 우호 관계 중시

온건 개화파들은 외교적으로 청과 전통적인 우호 관계를 중요시함으로써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조선의 독립을 보존하려는 정책을 펼쳤다. 즉, 청의 현실적인 힘을 인정하고 청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고 하였다.

(3) 급진 개화파(개화당)

㉠ 급진적 개혁 주장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젊은 양반 관료들로 구성된 소장파 고나료들은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근대 사상과 제도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 문명개화론

일본의 문명개화론에 영향을 받은 이들은 조사 사찰단, 보빙사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면서 메이지 유신을 모델로 삼아 일본 정치인 및 지식인들과 교류하였다. 즉, 문명개화론을 표방한 일본의 메이지 유신을 모범으로 삼아 서양의 과학 기술뿐만 아니라 그 바탕이 되는 근대적인 사상과 제도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였다.

㉢ 온건 개화파 비판

급진 개화파는 민권 신장과 군주권 제한, 신분 제도 폐지, 상공업 진흥, 종교의 자유 등 정치 ·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청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조선의 자주와 독립을 지키는 것이 급선무라고 여겼다. 이러한 입장에서 급진 개화파들은 스스로를 개화당 · 독립당으로 일컬으면서, 청에 의존하며 소극적인 개화 정책을 추구하는 온건 개화파들을 사대당 · 수구당이라고 비판하였다.

 

ㄷ. 급진 개화파(개화당)의 활동

(1) 개화당의 개혁 의지

김옥균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당 요인들은 박규수가 죽은 뒤에 중인 출신으로 개화사상의 선각자였던 유홍기의 지도를 받았다. 또한, 자신들이 직접 일본의 놀라운 발전상을 보고 근대적 국정 개혁의 시급함을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

(2) 개화 정책의 추진

개화당 요인들은 해박한 개화 지식과 넓은 해외 전문으로 고종의 신임을 받아 여러 가지의 개화 시책을 실천해 갔다. 이들의 건의로 박문국을 설치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한성순보가 창간되고, 군사와 학술 등을 배우도록 하기 위하여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였고, 신식 경찰 제도의 도입이 시도되었으며, 근대적인 우편 사업을 위하여 우정국을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적인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정부가 해결해야 할 가장 시급한 문제는 운영 자금의 확보였다.

(3) 민씨 정권 강력 비판

급진 개화파가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과 청에 의존하던 정부의 사대적인 태도 때문에 개화 정책이 원활하게 추진되지 못하는 현실을 강력하게 비판하자, 민씨 정권은 그동안 추진해 오던 개화 정책을 후퇴시키고 급진 개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지방이나 해외로 보냈다.

 

2. 갑신정변의 배경

ㄱ. 급진 개화파의 탄압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면서 민씨 정권의 요직을 차지한 친청 세력은 그들에 반대하는 김옥균, 박영효 등 급진 개화파를 탄압하였다. 세력이 우세하지 못했던 급진 개화파는 한동안 민씨 세력의 체제 안에서 박문국을 설치하여 신문을 발간하고 일본에 유학생을 파견하는 등 개혁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민씨 정권의 견제로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고, 개화정책이 지연됨에 따라 급진 개화파의 불만은 거져 갔다. 이후 점차 세력 기반을 넓힌 급진 개화파는 청과의 사대 관계 청산을 주장하였고, 민씨 정권의 부패와 무능을 비판하며 민씨 정권을 타도의 대상으로 삼았다.

ㄴ. 차관 도입의 실패

급진 개화파는 개화 정책을 시행하기 위한 자금 마련 방법을 둘러싸고 묄렌도르프의 제안을 받아들인 온건 개화파와 심하게 대립하였다. 민씨 정권이 당오전이라는 고액 화폐를 발행하려고 하자, 김옥균 등 급진 개화파는 화폐발행은 인플레이션을 가지고 올 뿐이라며 반대하고 일본으로부터 차관을 들여와 국가 재정난을 해결하려고 하였다. 고종의 위임장을 받은 김옥균은 일본으로 건너가 차관 교섭에 나섰으나, 실패하여 정부 내에서 신임을 잃고 곤경에 처했다. 그 결과 급진 개화파는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더욱 위축되었음은 물론, 자신들의 신변 위협마저 느꼈다. 이러한 난국에서 벗어나기 위해 급진 개화파는 정변을 도모하였다.

ㄷ. 청군의 철수

한편, 보빙사로 미국에 다녀온 민영익이 친청 사대론으로 기울었고, 때마침 청이 베트남 문제로 프랑스와 전쟁 상태로 들어가자 서울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의 절반을 철수시켰다. 이를 민씨 정권을 무너뜨릴 기회라고 여긴 급진 개화파는 청군의 반격을 막고 개혁에 필요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에 지원 요청을 하였다.

ㄹ. 일본의 지원 약속

급진 개화파는 서울 주재 미국 공사관의 지원을 얻는 데에는 실패하였으나, 일본 공사는 조선 진출에 걸림돌이던 청과 민씨 세력을 몰아내고 조선 내에서 우위를 차지할 좋은 기회로 판단하고 일본군 동원과 차관을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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