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임오군란(임오년에 군대가 난을 일으켰다)

후니 NO.1 2022. 4. 10.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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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임오군란의 발발

ㄱ. 원인

(1) 국가 재정의 고갈과 물가 상승

개화 정책이 추진되면서 정부의 재정 지출이 늘어나 국가 재정이 고갈되었다. 게다가 개항 후 외국 상품이 무차별 유입되고, 일본의 경제적 침탈로 인해 쌀, 콩 등 곡물이 일본으로 유출되고, 흉년까지 겹치면서 곡물 가격이 폭등하였다.

(2) 구식 군인과 하층민의 불만

그러자 구식 군인들의 급료가 밀리고, 일반 서민과 하층민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이들 사이에 외세와 정부에 대한 불만이 높아 갔다.  이와 같이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발은 양반 유생들뿐 아니라 구식 군인과 서울의 하층민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다.

(3) 별기군 창설

정부는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구식 군대를 줄여 없애고, 일본식 군사 제도를 도입하여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그리고 기존 5군영에서 선발된 80여명 병사를 일본인 교관을 통해 근대식 훈련을 받게 하였다.

(4) 구식 군대의 차별

신식 군대인 별기군이 창설됨에 따라 구식 군인들의 군제가 과거 5군영이 2영(무위영과 장어영)으로 통합되면서 상당수 구식 군인들이 실직당하거나 생계가 어려워졌으며, 국가 재정의 부족으로 급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열악한 대우를 받은 구식 군대에 비해 신식 군대인 별기군은 급료뿐만 아니라 의복 등 여러 면에서 좋은 대우를 받았다. 이에 구식 군인들은 정부의 개화 정책에 불만을 품게 되었다.

(5) 도봉소 사건

심지어 민씨 일파 등 집권층의 부패로 구식 군인들에 대한 급료가 13개월 동안 지급되지 않았다. 더구나 1882년 6월에는 무위영 소속 군인들에게 밀린 급료를 지급하는 과정에서 부패한 선혜청 관리들이 착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또한, 밀린 급료로 받은 쌀이 양도 모자랄 뿐만 아니라 겨와 모레가 섞여 있자, 이에 분개한 김춘영 · 우복만 등 구식 군인들이 미곡 수령을 거부하고 책임자를 구타하였다. 그러나 정부 관리가 오히려 주동자를 잡아들이자 군인들은 무기고를 파괴하고, 부정부패의 온상이었던 선혜청을 습격하였으며, 당시 선혜청 당상 민겸호의 집에 불을 질렀다.

 

ㄴ. 경과

(1) 일본 공사관의 습격

구식 군인들은 대원군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편, 무기고를 습격하고 무기를 탈취하였다. 그리고 별기군 부대로 쳐들어가 일본인 교관을 죽이고 일본 공사관을 습격하였으며, 다음날 창덕궁으로 쳐들어가 개화 정책의 중단을 요구하며 민겸호, 이최웅 등을 비롯한 민씨 정권의 고위 관료들을 죽였다.

(2) 민씨 세력 축출

이에 명성 황후는 충주 장호원으로 피신하였고, 일본 공사도 제물포로 도망쳤다. 열강의 경제적 침략과 민씨 정권의 부정부패로 고통 받던 하층민들은 왕십리와 이태원 등 서울 변두리에 많이 거주하였는데, 이들도 군인들의 봉기에 참여하여 왕궁을 습격하고 민씨 정권의 고관들을 살해한 뒤, 일본 공사 일행을 인천까지 추적하였다. 당시 민씨 세력인 김윤식 등은 청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3) 대원군 일시 재집권

구식 군인들이 청한 도움을 대원군이 수락하고, 구식 군인들의 궁궐 장악에 놀란 고종이 대원군을 불러들여 사태 수습을 맡기자, 군인들은 자진 해산하여 임오군란은 일단 진정되었다. 다시 집권한 대원군은 정부가 추진해 오던 개화 정책을 중단시켰으며, 개화 정책에 반대하다가 유배당한 위정척사파를 석방하고 요직에 등용하였다. 또한, 군란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통리기무아문과 별기군을 혁파하여 5군영과 삼군부를 부활시켰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강경하게 맞섰다.

 

ㄷ. 결과

(1) 청 · 일 양국의 대립

임오군란은 대원군의 재집권으로 일단 진정되는 듯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조선을 둘러싼 청과 일본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 결과 청 · 일의 군대가 조선에 주둔하게 되었고, 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침투가 강화되었다. 그러나 임오군란은 정부의 잘못된 개화 정책과 외세의 경제적 침투에 대항하여 구식 군인들과 도시 영세민들이 일으킨 반정부 · 반외세 운동이었다.

(2) 대원군의 압송

일본은 조선에 살고 있는 일본인을 보호한다는 구실을 내세워 군대를 파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민씨 세력의 요청을 받은 청은 재빨리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여 군란을 진압하고, 대원군을 군란의 책임자로 지목하여 청의 톈진으로 압송해감으로써 일본이 무력 개입할 수 있는 구실을 없애려고 하였다. 이로 인해 대원군의 재집권은 1개월만에 끝이 나고, 다시 집권하게 된 민씨 세력은 일본과 제물포 조약을 맺고 박영효를 수신사로 일본에 파견하였다.

(3) 제물포 조약과 수호 조규 속약의 체결(1882)

㉠ 조약 체결

일본의 하나부사 공사가 서울로 돌아오자 일본은 공사관이 습격 받은 일을 구실로 조선 정부와 6개조의 제물포 조약과 수호 조규 속양을 체결하였다.

㉡ 조약 내용

20일 이내 군란 책임자의 처벌, 배상금 50만원 지불, 조선의 사죄 사절단 파견, 일본 상인의 여행 범위 확대, 피해자 보상, 일본 공사관 경비를 위한 경비병의 주둔 등이었다.

㉢ 체결 결과

일본의 경제적인 침투가 더욱 유리해져 일본인 관리와 상인들의 활돌이 넓어졌으며, 공사관 호위라는 명목으로 일본 군대가 서울에 상주하게 되었다. 그리고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사절이 일본에 파견되면서 태극기를 처음 사용하였다.

(4) 청의 내정 간섭 본격화

㉠ 배경

임오군란을 계기로 청은 조선의 내정에 적극적으로 간섭하였다.

㉡ 군대 주둔

위안 스카이 등이 지휘하는 군대를 상주시켜 조선 군대를 훈련시켰다.

㉢ 고문 파견

마젠창과 묄렌도르프를 고문으로 파견하여 조선의 내정과 외교 문제에 깊이 개입하였다. 또한, 차관 제공을 구실로 조선의 이권을 빼앗았다.

㉣ 조 · 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 체결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규정한 조 · 청 상민 수륙 무역 장정을 강제로 체결하여 청의 상인들이 일본에 비해 쉽게 내륙 시장에까지 진출할 수 있는 경제적 특권을 보장하였다. 이로써 청은 조선의 내정과 외교 정책을 간섭하게 되었고, 경제적 침략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 민씨 세력의 재집권

청의 도움으로 다시 집권한 민씨 세력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위안스카이의 간섭을 받아들여 친청 정책을 쓰게 되었다. 그리하여 임오군란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외교적 · 경제적 침투는 상당히 제한 되었고, 청의 정치적 간섭과 경제적 침탈은 청 · 일 전쟁 때까지 10여 년간 크게 강화되었다. 청의 내정 간섭과 조선 정부의 친청 정책으로 인하여 개화 정책은 후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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