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화 정책의 추진
ㄱ. 개화 사상의 형성
(1) 통상 개화론의 발전
흥선 대원군이 집권하여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추진하던 1860년대, 국내에서는 서구 열강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는 입장이 주류였지만, 부국강병을 위하여 서양 문물의 수립이 필요하다는 개화 사상가들도 등장하였다. 이처럼 조선의 일부 지식인들 사이에 표면화된 통상 개화론은 문호 개방을 전후하여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론, 곧 개화사상으로 발전해 문호 개방의 바탕이 되었다.
(2) 개화사상의 발전
19세기 말에 박지원, 박제가 등 북학파 실학자들은 화이론적 세계관을 비판하면서, 청과의 활발한 교류와 서양의 선진 기술의 적극적인 수용을 주장하였다. 또한, 부국안민을 위해 상공업을 적극 진흥하고, 양반 중심의 사회 질서를 깨뜨려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와 같은 그들의 사상은 19세기에 들어와 이규경, 최한기 등에 의하여 계승되고, 다시 19세기 후반박규수와 오경석, 유홍기 등 초기 개화사상가들에게 계승되어 통상 개화론으로 발전하였다.
(3) 초기 개화 사상가들은 서양 문물을 소개한 서적들을 통해 서양의 기술과 문물, 그리고 국제 정세 및 각국의 제도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서양인의 침략에 맞서려면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의 우수한 기술을 적극 받아들여 부국강병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이들 초기 개화사상가들은 북학파 실학자의 사상을 발전 계승하고, 밖으로는 청에서 진행되고 있던 양무운동과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던 문명개화론의 영향을 받은 사상가들이었다.
(4) 문호 개방을 전후로 한 초기 개화사상가
㉠ 박규수
양반 출신으로 두 차례 청에 사신으로 다녀온 박규수는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 혼란에 빠진 청의 현실과 양무운동의 과정을 직접 목격하고 돌아왔다. 이후 그는 통상 수교 거부론이 대세를 이루고 있던 상황에서도 자주적으로 문호를 열고 통상하자는 개화론을 펼졌다. 나아가 일본과 서양이 한편이 되어 침입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일본과 개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처럼 박규수는 통상 개국론을 주장해 개항의 토대를 마련하였다.
㉡ 오경석과 유홍기
역관이 오경석은 중국을 자주 왕래하면서 『해국도지』, 『영환지략』 등과 같은 세계 지리와 서양 문물에 관한 서적들을 국내에 들여와 이를 유홍기에 전하고, 한의사인 유홍기는 이 서적들을 읽으면서 개화사상을 연구하였다.
㉢ 개화사상의 교육
개화사상의 선각자 중, 오경석과 유홍기는 중인 신분이었기 때문에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이들은 양반 자제들에게 개화사상을 심어 주기 위해 세계정세와 서구 문물을 전하며 개화 세력을 육성하고자 하였다. 1870년대에 들어 박규수는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유길준, 김윤식 등 젊고 유능한 양반 자제들에게 북학파의 실학사상을 담고 있는 『연암집』, 그리고 중국을 통하여 얻은 견문과 서양 관련 서적으로 북학 사상을 가르쳐 개화 세력의 형성과 성장에 선구자 역할을 하였다.
㉣ 개화사상의 확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등은 개항 직후 박규수와 오경석이 잇달아 사망하자, 한의사 유홍기의 지도를 받으면서 사상의 폭을 넓혀갔다. 또한, 개화승 이동인, 상인, 군인 등과도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사귀면서 개화사상을 더 진전시켜 개화파로 성장하였다. 이들은 사절단으로 청과 일본으로 건너가 두 나라의 발전된 모습을 목격하고 청의 양무운동과 일본의 메이지 유신의 영향을 받아 개혁 의지를 구체와 시켰다.
◎ 이동인
조선 고종 때의 승려이며 개화파 정치가이다. 일본에 밀항하여 후쿠자와 유키치 등과 교제하며 개화 문제를 논의하였고, 국내에 들어와 김옥균 등과 개화에 힘썼다. 일본에 시찰단 파견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 개화파 형성
이렇게 형성된 개화파는 여러 계층을 포섭하여 1870년대 말에는 확고한 정치 세력을 형성하였고, 1880년대에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자 대거 정계에 진출하여 정부의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는 핵심 실무 관료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청의 내정 간섭이 심해지는 상황에서 개화 정책의 추진 방법과 청 · 일 양국에 대한 인식 등을 둘러싸고 이견이 생겨 온건 개화파와 급진 개화파로 분화하였다.
ㄴ. 정부의 개화 정책
(1) 수신사 파견
조선 정부는 강화도 조약 체결 직후 부국강병에 필요한 기술과 정보를 수집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였다.
㉠ 1차 수신사 파견(1876)
개항 후 일본의 요청에 따라 75명의 일행을 거느리고 간 김기수 일행은 20여 일 동안 일본의 정치, 군사, 교육, 문화 등 근대 시설들을 시찰하고 들어와 『일동기유』를 저술하여 근대 문물을 소개하였다.
㉡ 2차 수신사 파견(1880)
강화도 도약 이후 나타난 통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제 2차 수신사로 김홍집을 일본에 파견하였다. 5개월 동안 머물면서 무관세 무역의 시정과 쌀 유출 등의 현안을 개정하여는 목적은 이루지 못하였으나, 군사 · 교육 · 산업 등 일본의 발전상을 폭넓게 시찰하였다. 귀국할 때는 『조선책략』을 들여와 조선의 외교 정책에 영양을 주며 유생들의 반발을 사기도 하였다.
㉢ 영향
수신사를 통해 일본의 발전상과 세계 정세의 변화를 알게 된 정부는 개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였다. 이에 정부는 부국강병을 목표로 개화파 인물들을 정계에 등용하였고, 이들을 중심으로 개화 정책을 추진해 나갔다.
(2) 제도의 개편
정부는 국가 발전과 근대적 문물의 수용을 위해 관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 행정 기구의 개편
개항 이후 정부는 기존의 의정부와 6조 체제로는 개화 정책을 본격적으로 펼치기 힘들다는 판단 아래, 청의 양무운동 추진기구인 총리하문을 본떠 근대적 행정 기구로 통리기무아문을 새로이 설치하였다. 개화 정책을 총괄하는 통리기무아문은 그 아래에 실무를 담당하는 12사를 두어 개항 후 새롭게 대두한 청 · 일 양국과의 외교와 통상을 비롯하여, 군사 · 산업 · 외국어 교육 등 여러 분야의 업무를 담당하게 하였다. 통리기무아문에는 김윤식, 박정양, 어윤중, 김홍집, 김옥균, 홍영식 등 개화파 인사들이 등용되었다.
㉡ 군사제도의 개편
통리기무아문은 부국강병을 위해 먼저 군사 제도를 바꾸었다. 종래의 5군영을 무위영과 정어영의 2영으로 개편하여 효율성과 국왕의 군부 장악력을 높였으며, 신식 군대를 양성하기 위하여 별도로 별기군을 창설하였다. 별기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하고, 채용된 일본인 교관을 통해 근대적 군사 훈련을 받고 사관생도로 양성되었다.
㉢ 감성청의 설치(1882)
불필요한 재래 기관의 인원 감소와 비용 절감을 위해 설치하였다(6개월간 존속).
㉣ 규장각의 기능 부활
개화 정치를 뒷받침하는 학술기관으로 활용하려 하였다.
(3) 조사 시찰단의 파견
통리기무아문은 일본의 정세를 파악하고 근대적 행정 기구의 운영과 개화 정책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조사 시찰단을 파견하였다. 12명의 조사들은 약 4개월여 동안 학교, 공장 등 근대 시설과 법률, 조세 제도 등 근대 제도를 살펴보고 돌아와 각기 담당 분야에 관한 상세 보고서인 문견사건을 국왕에게 올려 개화 정책을 뒷받침하였다.
(4) 영선사의 파견(1881)
통리기무아문은 김윤식을 영선사로 삼아 청의 톈진에 유학생과 기술자를 파견하여 서양의 근대식 무기 제조법과 군사 훈련법을 배우게 하였다. 하지만 정부의 재정적 뒷받침이 부족하여 인원이 줄고, 임오군란(1882)이 일어나자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1년 만에 되돌아왔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서울에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무기 제조 공장인 기기창(1883)이 설치 되었다.
(5) 보빙사의 파견(1883)
조선 정부는 미국과 수교 이후, 미국 공사가 서울에 부임한 답례로 민역익을 정사, 홍영식을 부사, 서광범을 종사관으로 하는 11명의 보빙 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하였다. 보빙사는 아서 대통령을 두 차례 만나 국한문 혼용체로 쓰인 국서를 전달하고, 외교와 통상에 관해 협의하였다. 미국의 안애로 공장, 회사, 병원, 신문사, 육군사관학교 등을 되돌아보았으며, 보스턴에서 개최된 세계박람회도 시찰하였다. 보빙사 일행 중 일부는 유럽을 거쳐 귀국하였으나, 유길준은 미국에 남아 유학하였다. 보빙사는 근대 산업과 문물을 시찰하고 돌아와 통신제도의 시급함을 알림으로써 우편 제도가 신설되고 개화파에게 큰 자극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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