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위정척사의 개념과 주도층
ㄱ. 위정척사의 개념
정학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과 이단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성리학을 정통 사상으로 신봉하였던 조선 사회에서, 위정이란 정학인 성리학과 정도인 성리학적 질서를 수호하는 것이고, 척사란 사학인 서양의 문물과 이단인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화 사상을 배격하는 것었다. 그나라 개항 전후에는 외세를 배격하는 의미가 강하였다.
ㄴ. 위정척사론 대두
19세기 후반 성리학을 신봉하던 보수적 유생들은 서양과 일본 세력을 조선의 유교 문화를 무너뜨리려는 오랑캐로 인식하였다. 이에 유교 문화에 기반을 둔 조선의 전통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는 천주교와 서양 문화 그리고 서양 세력의 경제, 군사적 침략을 물리쳐야 한다는 위정척사론을 내세웠다.
ㄷ.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그리하여 보수적 유생은 서양의 통상 요구나 강화도 조약,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 등 개항 전후 당면했던 여러 문제들에 대해 강력하게 자신들의 의사를 관철시키려는 위정척사 운동을 전개하였다. 위정척사 운동은 이미 1860년대부터 국내외의 정세와 맞물려 전개되었는데, 이항로, 기정진 등 전통적 유생층에 의해 주도되었고, 특히 이항로의 문인들인 유인석 최익현 등에 의해 계승되었다.
2. 위정척사 운동의 전개 과정
ㄱ. 1860년대
(1) 통상 수교 반대 운동
서구 열강이 통상을 요구하고 천주교와 서양 문물이 들어오자, 유생들은 외국과의 교역에 의한 국내 산업의 피폐, 천주교의 확산에 따른 미풍양속의 파괴 등을 들어 서양과의 통상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다.
(2) 척화 주전론
통상 반대 운동은 서양의 무력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척화주전론으로 이어졌다.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이항로, 기정진 등은 서양의 무력 침략에 맞서 싸우자는 척화주전론을 내세우며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를 강력히 뒷받침하였다. 이들은 서구와의 통상이 정치 · 경제 · 문화적 예속을 가져올 것을 걱정하였다.
ㄴ. 1870년대
(1) 개항 반대 운동
1870년대에 이르러 일본이 개항을 요구해 오자 이항로의 문인들인 유인석, 최익현 등의 유생들은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며, 일본과 서양에 대한 문호 개방이 가져올 위험을 예리하게 지적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조약 체결에 반대하였다.
(2) 왜양일체론
1876년 강화도 조약을 맺을 무렵에는 일본이 서양에게 이미 문호를 개방하였으므로 서양 세력과 다름없다는 왜양일체론을 내세워 개항 불가론을 주장하였다. 개항을 하면 서양 종교가 들어와 전통 윤리가 무너질 것이고, 서양의 사치스런 공산품과 우리 생활에 필요한 농산품을 교환하면 경제가 파멸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이항로의 척화 주전론(1860년대) |
서양 오랑캐의 화가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홍수나 맹수의 해보다 더 심합니다. 전하께서는 부지런히 힘쓰시고 경계하시어 안으로는 관리들로 하여금 사학의 무리를 잡아 베게 하시고, 밖으로는 장병으로 하여금 바다를 건너오는 적을 정벌케하소서. |
최익현의 왜양일체론(1870년대) |
일단 강화를 맺고 나면 저들은 물화를 교역하는데 욕심을 낼 것입니다. 저들의 물화는 모두 지나치게 사치스럽고 기이한 노리개로, 손으로 만든 것이어서 그 양이 무궁합니다. 우리의 물화는 모두가 백성들의 생명이 달린 것이고 땅에서 나는 것이므로 한정이 있습니다. ......(중략)...... 저들이 비록 왜인이라고 하나 실은 양적입니다. |
ㄷ. 1880년대
(1) 개화 반대 운동
1880년대 초 정부가 개화 정책을 추진하고 『조선책략』이 유포되자, 양반 유생들을 중심으로 위정척사 운동이 일어나 정부의 개화 정책과 서양과의 수교에 격렬하게 반발하였다. 특히, 미국과 통상 조약의 체결을 추진할 무렵 위정척사 운동은 개화 반대 운동으로 이어져 절정을 이루었다.
(2) 『조선책략』의 유포
수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김홍집이 청의 외교관 황쭌셴이 쓴 『조선책략』을 가지고 돌아와 유포시켰는데, 여기에는 자강을 위하여 문호를 개방하여야 하고,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 내기 위해 조선은 중국 · 일본 ·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다. 고종은 이 책을 대신들에게 검토하게 하면서 전국의 유생들에게도 나누어 주었다. 『조선책략』의 유포는 정부의 개화 정책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위정척사 운동을 확대시키는 계기도 되었다.
(3) 집단 상소 운동
『조선책략』 유포로 양반 유생들은 정부가 전면적인 개방 정책을 추진한다고 생각하며 거세게 반발하여, 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집단 상소를 올렸다. 그 대표적인 것이 이만손을 중심으로 영남 유생들이 올린 영남 만인소와 홍재학을 비롯한 강원도 유생들이 올린 만언 척사소였다. 유생들은 외국 종교의 전래로 우리의 유교적 예절과 풍속이 흐트러지고, 서양 상품의 유통으로 조선이 경제적 위기에 처하게 될 것을 우려하였다.
(4) 영남 만인소와 만언 척사소
이만손이 중심이 된 영남 지방의 유생들은 미국과 수교를 맺자는 『조선책략』의 내용을 조목조목 비판하면서 김홍집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또한 러시아 · 미국 · 일본이 똑같은 오랑캐로 여겨 다같이 경계할 대상이라는 상소문을 작성하고, 1만 명에 가까운 유생들의 서명을 받아 궁궐 앞에서 집단 상소 운동을 벌였다. 이를 계기로 개화 반대 운동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특히 홍재학은 통리기무아문을 혁파하고 5위제를 다시 설치하라는 만언 척사소를 올리고, 국왕까지 규탄하였다가 처형당했다. 그러나 미국과의 외교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주장이 점차 힘을 얻게 되었다.
ㄹ. 1890년대
위정척사 운동은 1894년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 일반 민중과 결합하여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 운동과 국권 피탈 이후의 무장 독립 투쟁으로 계승되었다.
3. 위정척사 운동의 의의
ㄱ. 긍정적 측면
위정척사론자들이 외국과의 교역 및 개화 정책에 반대한 주요 이유는 서양의 공업 생산품과 우리의 농업 생산물을 교역하면 경제적 파멸을 가져온다는 것과 일단 문호를 개방하면 일본을 비롯한 열강의 계속되는 침략을 막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서양과 일본의 정치적 · 경제적 침략에 강력히 맞선 반침략, 반외세의 자주적 민족운동 의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정신은 이후 항일 의병 운동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ㄴ. 부정적 측면
이들 유생층의 위정척사 운동은 반외세적 자주 운동으로만 제시된 것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조선 왕조의 전제 군주적 정치 체제, 지주 중심의 봉건적 경제체제, 양반 중심의 차별적 사회체제, 그리고 성리학적 지배 질서를 고수하려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ㄷ. 변화 양상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의 침략을 막으려는 반외세 자주 운동이었지만, 전통적인 사회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려고 하여 시대의 흐름에 뒤떨어진 한계를 지니고 있었으나, 유생층 가운데서도 곽기락, 윤선학, 심석영 등 일부 혁신적 인사들은 서양의 종교는 배척하되, 유교 문화를 계승하면서 서양의 물질문명을 부분적으로 수용하자는 동도서기론을 주장하며 개화 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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