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강화도 조약과 개항
ㄱ. 강화도 조약의 배경
(1) 흥선 대원군의 하야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취하며 10년간 집권하던 대원군은 고종의 친정을 촉구하는 최익현을 비롯한 유생들의 계속되는 상소를 계기로 권좌에서 물러나고(1873), 고종이 정치 전면에 나서고 민씨 세력이 정권을 주도하였다. 이에 따라 대외 정책에 변화가 나타났고, 개항과 통상 무역을 주장하는 집단이 정치적으로 성장하였다.
(2) 민씨 정권의 등장
㉠ 대원군의 개혁 정치 무력화
정권을 잡은 민씨 세력은 양반 유생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만동묘와 서원을 차례로 복구시키는 등 대원군이 시도한 개력을 무력화시켰지만, 한편으로는 대원군이 추진하였던 여러 궁전의 공사 등을 계속 실시하였다. 이로 인해 국가 재정은 점차 악화되었으며, 매관매직이 만연하였고, 관리들의 부정부패는 더욱 심화되었다.
㉡ 대외 정책의 변화
민씨 정권은 대외 정책에서도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부분적으로 완화하고,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써 국내의 취약한 지지 기반을 보완하여고 하였다. 청과 전통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하면서 일본과도 유화 정책을 폈다.
㉢ 일본의 팽창
1854년 미국에게 개항당한 일본은 곧이어 메이지 유신(1868)이라는 근대 국가의 체제를 갖추고 자본주의를 서두르며 해외 진출을 꾀했다.
㉣ 일본의 문호 개방 요구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서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조선에 통보하면서 국교 회복을 요구하였다. 대원군은 일본이 보내온 외교 문서에 황제 국가임을 나타내는 문구가 있고, 조선 정부에서 보내준 도장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하여 외교 문서의 접수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고종이 정치 전면에 등장하면서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소수의 통상 개화론자들의 움직임이 힘을 얻었다. 특히, 박규수는 일본의 변화를 인정하고, 조선의 국방력이 취약한 상황에서 일본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해 자주적으로 개국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일본과의 수교 교섭
조선 정부는 박규수의 주장을 받아들여 일본과 국교 수립을 위한 교섭을 추진하였지만, 일본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고, 조선 정부도 개국에 대한 확고한 의지가 없었기 때문에 교섭은 결렬되었다.
(3) 운요호 사건
㉠ 정한론 대두
조선이 일본 사신의 외교 문서 접수를 거부하자, 무사 계층의 불평을 해외로 돌리기 위해 조선을 무력으로 침공하자는 정한론을 제기하였다. 정한론을 단행할 시기를 둘러싸고 반대에 부딪혀 실현되지는 않았으나, 근대화를 위해 대외 침략을 시작한 일본은 무력으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려고 하였다.
㉡ 일본의 무력 시위
최익현의 상소를 계기로 흥선 대원군이 하야(1873)한 후, 민씨 세력의 집권으로 외교 정책이 변화하는 기미가 보였다. 이에 일본은 국교 교섭을 유리하게 끌고 가기 위해 오키나와와 타이완을 침공한 여세를 몰아 미국의 포함 외교를 모방해 운요호를 조선 연해에 파견하였다.
㉢ 조선 수비군의 발포
운요호가 무력시위를 하면서 해안을 측량하고 강화도의 초지진에 상륙하려 하였다. 이에 초지진에 있던 수비대가 경고 사격을 하자, 운요호는 함포를 발사하여 공격하였다. 이어서 초지진과 영종진의 포대를 파괴하고, 영종진에 상륙하여 관아와 민가를 노략질하였다(1875).
㉣ 결과
이후 일본은 국기를 게양한 군함에 포격을 가한 것이 주권 침해라는 주장을 내세워 조선에 통상 조약을 맺자고 요구해 왔다. 당시 청은 조선과 이본의 정면충돌을 피하게 하기 위해 조선 정부에 조약 체결을 권유하였다. 이때 위정척사론자들을 중심으로 일본과의 항전을 주장하기도 하였지만, 박규수를 중심으로 제기된 개항에 응하자는 주장이 관철되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일본과 회담을 개최하였다.
ㄴ. 강화도 조약의 체결
(1) 체결 과정
조선은 충분한 준비를 갖추지 못한 채 1876년 운요 호 사건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강화도에서 전권 대신 신헌과 일본의 특명 전권 관리 대신 구로다 기요 다카 사이에 전문 12개 조를 내용으로 하는 조약을 체결하고, 많은 유생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문호를 개방하였다.
(2) 성격
강화도 조약 체결 당시 조선 정부는 단절된 외교 관계를 회복한다는 차원에서 일본과의 교섭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은 근대적 국제 관계와 국제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 조약의 정확한 의미와 결과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요구를 그대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강화도 조약은 일본이 과거 서구 열강에 강요당했던 불평등한 내용을 조선에 그대로 강요하였기 때문에 타율적이고 불평등한 조약이었다.
(3) 내용
강화도 조약은 우리나라가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으로, 이로써 조선은 서양 중심의 자본주의 체제와 대면하게 되었다.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 원산, 인천 등 세 항구를 개항해야 했으며, 일본에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이나 해양 측량의 자유 등을 허용함으로써, 일본은 조선을 정치, 군사적으로 예속시킬 조건을 마련하였다. 치외 법권과 해안 측량권은 조선의 주권을 침해하는 독소 조항이였다.
(4) 결과
일본의 조선 진출의 길을 열어 놓았고, 다른 서구 열강과 조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선례가 되었다. 이후 강화도 조약의 내용을 보완하여 더욱 구체화시킨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통상 협정인 조일 무역 슈칙이 체결되었다.
강화도 조약 |
정식 명칭은 조일 수호 조규이고, 병자 수호 조약이라고도 한다. 보통 강화도 조약은 조일 수호 조규(1876.2.26),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8.24), 조일 무역 규칙(1876.8.24)을 합쳐서 부른다. 일본의 문호 개방 요구에 대해 대체로 반대나 신중론이 대세였으나 박규수와 같이 개항의 불가피성을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결국, 조정에서는 박규수의 주장과 함께 일본의 강경한 요구, 일본을 끌어들여 서양 세력과 남하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도록 종용한 청의 의도 등으로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였다. |
치외 법권 |
외국에 있으면서도 그 나라 법률의 적용을 받지 않는 특권으로, 오늘날에는 국가 원수, 외교 사절 등에게만 인정된다. 즉, 죄를 지은 사람에게 그 나라의 법을 적용하지 않고 죄를 지은 사람의 관리가 심판할 수 있는 영사 재판권을 말한다. |
※ 강화도 조약의 주요 내용
조항 | 주요 내용과 일본의 목적 |
제 1관 | 조선은 자주의 나라이며, 일본국과는 평등한 권리를 보유한다. → 조선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부인하도록 해 향후 조선 침략을 용이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
제 2관 | 일본국 정부는 지금부터 15개월 후 수시로 사신을 조선국 서울에 파견하여 예조 판서와 외교상의 문제를 상의할 수 있다. → 수신사(김기수, 김홍집)파견 → 『조선책략』의 유포(1880) |
제 4관 | 조선국은 부산 외에 2개 항구를 개항하고 일본인이 왕래 통상함을 허가한다. → 3개 항구 개항 → 경제적(부산, 1876), 군사적(원산, 1880, 러시아 견제), 정치적(인천, 1883) 거점을 마련하려는 일본의 침략 의도를 드러낸 것이다. |
제7관 | 조선국 연해의 섬과 암초는 극히 위험하므로 조선국은 일본국의 항해자가 자유로이 해안을 측량하도록 허가한다. → 해안 측량권을 인정받아 조선의 자주권을 부인하는 주권 침해였다. |
제 10관 | 일본국 국민이 조선국 지정의 각 항구에 머무르는 동안에 죄를 범한 것이 조선국 국민에게 관계 되는 사건일 때에는 모두 일본 관원이 심판한다. → 일본의 치외 법권(영사 재판권)을 인정함으로써 조선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불법 행위에 대한 조선의 사법권을 배제하였다. (가장 독소적) |
제 11관 | 양국 상인의 편의를 꾀하기 위해 추후 통상 장정을 체결한다. → 수호 조규 부록과 통상 장정이 체결되었다. |
2. 조일 수호 조규 부록과 조일 무역 규칙의 체결
ㄱ. 조일 수호 조규 부록(1876)
강화도 조약을 보완하기 위해 체결된 부속 조약으로 조선 국내에서의 일본 외교관의 여행 자유, 개항장에서의 일본 거류민의 거주 지역 설정(10리 제한)과 일본 화폐의 유통 등을 허용하였다.
ㄴ. 조일 무역 규칙(1876)
잠정적 통상 협정으로 일본의 수출입 상품과 선박에 대한 무관세를 보장하였으며, 조선 양곡(쌀과 잡곡)의 무제한 수출을 허가함으로써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ㄷ. 체결 결과
이로 인해 조선 경제가 일본 경제에 예속되어 조선의 자주적인 자본주의 발전이 어려웠고, 조선 정부와 상인들은 큰 피해를 입게 되었다. 또한, 조선은 국내 산업에 대한 보호 조치를 취할 수 없게 되었다.
조일 통상 장정 체결(1883) |
1876년 강화도 조약 체결 때 조선은 일본 무역품에 대해 무관세를 약정하였다. 관세권의 상실이 주는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조선 정부는 무관세 조항을 개정하기 위해 일본에 수신사 김홍집을 파견하는 등 교섭을 하였으나 일본 측의 무성의한 태도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1882년 조미 수호 통상 조약에서 미국이 관세의 자주권을 인정하자, 일본도 1883년 조일 통상 장정을 체결하여 조선의 관세권을 인정하였다. |
'한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개화 사상 (0) | 2022.04.08 |
---|---|
불평등 조약의 체결 (0) | 2022.04.07 |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신미양요 (0) | 2022.04.05 |
병인양요 (0) | 2022.04.04 |
흥선대원군 2 (0) | 2022.04.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