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ㄱ. 발단
병인양요 이후 미국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앞세워 조선에 들어와 지방관에게 두 차례에 걸쳐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미국의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선원 140여 명을 데리고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였다. 또한, 남연군의 유해를 미끼로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흥선 대원군의 생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지역 주민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달아난 오페르트는 영종도에서 다시 통상 요구하다가 정부의 완강한 거부에 밀려 쫓겨났다.
ㄴ.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서양인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풍조가 널리 퍼졌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의 경계심이 더욱 높아졌으며,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한층 강화하였다.
2. 신미양요(1871)
ㄱ. 원인
미국이 제너럴 셔먼 호 사건을 구실로 배상금 지불과 통상 조약의 채결을 여러 차례 요구하였지만 흥선 대원군은 이를 거절하였다.
ㄴ. 경과
그러자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제독이 이끄는 콜로라도 호 등 5척의 군함이 강화 해협에 나타나 조선군 진지에 포격을 가했고, 1,200여 명의 병력으로 강화도를 공격하였다.
ㄷ. 결과
강화도에 상륙하여 초지진과 덕진진을 함락시킨 미국 함대가 광성보를 수륙 양면으로 공격해 오자, 어제연이 이끄는 조선의 수비대 600여 명은 광성보에서 결사적으로 항전하였다. 비록 전력의 열세로 광성보는 미국군에 점령당하였지만, 조선 정부는 미군 측과의 협상에 일체 응하지 않고 단호하게 통상 요구를 거절하였다. 미군은 조선 군민이 거세게 저항하고, 외교 협상도 기대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50여 일만에 원정을 중단하고 퇴각하였다.
3. 척화비 건립
두 차례에 걸쳐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격퇴한 대원군은 국방을 강화하고, 서울 종로 거리와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서양과의 통상 수교 거부 의지를 분명히 하였다.
4.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의의와 한계
흥선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으려는 자주적인 성격도 있으나, 그만큼 변화하는 세계정세에 주체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기회를 놓쳐 근대화를 지연시키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 어제연 장군의 수자기 |
어제연 장군의 수자기는 미 해군 사관학교 박물관에 136년간 잠들어 있다가 2007년에 10년간 장기 임대 형식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왔는데, 깃발 오른쪽 아래가 훼손되어 천을 덧대었다. 이는 당시 광성보 전투에서 승리한 미군이 관례에 따라 깃발을 찢어 가져갔다는 설과 미군이 강제로 내릴 때 찢어져다는 설이 있다. 수자기는 조선 군영의 지휘관을 상징하는 깃발로, 평상시에는 군사를 조련할 때에만 걸었고 전시에는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에 게양하였다고 한다. |
※ 척화비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는데도 싸우지 않는 것은 곧 화의하는 것이요, 화이를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이러한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은 서양 열강을 오랑캐로 보는 척사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 흥선 대원군의 양이보국책 유시
1866년 일어난 병인양요로 도성 안이 혼란할 때, 당시 집권자인 흥선 대원군이 정부 관료에게 서양의 외침에 철저히 항전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 내린 유시(관청에서 가르침을 위해 내린 문서)를 말한다. 병인양요를 계기로 서양 세력의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하는 흥선 대원군의 정책은 더욱 굳어졌으며,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도 심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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