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민생 안정책
고종이 즉위할 무렵 삼남 지방에서 빈번하게 일어난 농민 봉기는 민심을 혼란스럽게 하였으며, 정부의 재정에도 타격을 주었다. 대원군은 농민 봉기의 주요 원인이 삼정의 문란에 있다고 보고 이를 개혁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민생을 안정 시키려 노력하였다.
ㄱ. 전정의 개혁
양반과 토호(유생)들이 세금을 안 내려고 토지 대장에서 누락시킨 토지(은결)를 찾아내고, 일부 지방에서 양전사업을 실시하여 국가의 전세 수입을 늘렸다. 그리고 권세가와 지방관, 양반 토호가 함부로 농민의 토지를 빼앗지 못하게 하고, 토지겸병을 금지시켜 전정을 바로잡으려 하였다.
ㄴ. 군정의 개혁
종래 상민(양민)에게만 징수해 오던 군포를 호포로 바꾸어 양반에게도 징수하는 호포제를 실시(1871년)하여, 조세 부담을 공평히 하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자 하였다. 호포제란 명칭은 이전처럼 신분에 따라 군포를 징수하지 않고, 호마다 거둔다하여 붙여진 명칭이다.
호포제와 사창제 |
1. 호포제란 양반들의 면역 특권을 폐지하고, 종래 양인 장정에게 부과하던 군포를 양반, 상민의 구분 없이 호(=집)를 기준으로 평등하게 거두는 것으로, 이전에는 양반의 반발로 실시되지 못하였으나, 대원군은 양반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매호당 2냥씩 호포를 징수하였다. 2. 사창제란 빈민 구제를 위해 각 지방의 군현에 설치한 사창(곡식 대여 기관)을 민간인이 관리, 운영하고 관청의 감독을 받게 한 제도로, 이는 면민들이 덕망과 경제적 여유가 있는 마을 사람 중 사창을 관리하는 사수로 선발하여 자치적으로 사창을 운영해 아전의 간여를 배제한 것이다. 3. 호포제와 사창제의 시행으로 국가 재정이 확충되고, 농민(상민)들의 부담이 어느 정도 줄어 대원군의 권력 기반이 강화되었다. |
ㄷ. 환곡의 개혁
세도 정치 때 고리대로 변질되어 삼정 가운데 가장 폐단이 심했던 환곡제를 폐지하고, 사창제로 개혁하여 관리가 아닌 지방 유력자에게 운영을 맡겨 탐관오리와 토호의 중간 수탈을 막고자 하였다. 사창제의 실시로 관리의 부정을 뿌리 뽑진 못했지만, 농민의 부담을 다소 줄여 주었고, 국가 재정에도 보탬이 되었다.
2. 사회 기강 확립
흥선 대원군은 양반과 지방 토호들의 백성에 대한 사사로운 형벌과 부당한 행패를 엄금하였고, 불량배들이 민가를 떠돌며 절도와 약탈을 일삼는 행위도 단속하였다.
3. 검소한 생활 강조
한편, 흥선 대원군은 테두리가 작은 갓에 소매가 좁은 두루마기나 도포를 입도록 권장하였다. 또한 흰 신발이나 비단 신발 대신에 검수한 검정 신발을 장려했으며, 50세 이하의 서리나 일반 상민들에게 명주옷을 입지 못하게 하는 등 허례허식과 사치를 억제하고 풍속의 개략에 힘썼다.
4. 국방 강화책
훈련도감을 재정비하여 군사력을 증각하였으며, 강화도 등 경기 연안에 서북지방 포수들을 뽑아 근무하게 하였다. 수군통제사의 지위를 격상시키고 통제중군을 설치하여 수군을 강화함으로써, 수시로 출몰하는 이양선에 대비하였다. 또한,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화포 기술을 적극적으로 도입하였다. 이러한 군사 제도의 개편과 군사력의 강화는 조선 왕조의 안정을 기하려는 통치 체제 정비의 일환이었으며, 프랑스와 미국의 침공을 격퇴하는데 기여하였다.
5. 통상 수교 거부 정책
흥선 대원군은 외세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국방력을 강화하고 통상 수교 요구를 거절하는 한편, 천주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하였다.
6. 개혁정치의 의의와 한계점
ㄱ. 의의
흥선 대원군은 개혁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전통적인 통치 체제를 재정비하여 국가 기강을 바로 잡았으며, 백성에 대한 양반 지배층의 부당한 억압과 수탈을 금지시켜 민심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조선 왕조의 전통적 사회 질서 안에서 전제 왕권 강화를 목표로 추진되었다는 한계성을 지니고 있어, 무너져 가는 조선 사회를 얼마간 연장시켜 주었을 뿐, 위기 상황에 대한 근본적인 치유책은 될 수 없었다.
ㄴ. 한계점
(1) 토지 문제의 근본적 해결 미흡
흥선 대원군의 개혁 정치는 토지 문제를 중심으로 한 지주와 농민 간의 대립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으므로, 1860년대 후반에 들어 서자 농민 봉기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2) 지지층 포섭 미흡
대원군 정권은 조선 후기 사회의 변화 속에서 성장하고 있던 부농, 부상, 수공업자들을 포섭하지 못하였고, 지지도 이끌어 내지 못하였다.
(3) 양반 유생들의 반발
대원군의 개혁은 양반이 가진 전통적 특권의 일부를 규제하여 민생 안정과 국가 재정의 확대를 도모하는 것이어서 양반 유생들에게 배척되었다. 양반 유생들은 대원군의 대외 정책인 통상 수교 거부 정책에 대해서는 적극 지지하였으나, 대원군의 내정 개혁 정책인 서원 철폐, 호포제 실시, 원납전 징수 등에서는 크게 반발하였다.
(4) 이필제의 난
1871년(고종 8년) 3월 10일 향반 출신 동학교도 이필제가 경북 영해에서 봉기하였다.
(5) 대원군의 실각
1873년 말에 최익현이 상소를 올려 대원군의 정책을 격렬하게 비판하며 그의 퇴진과 고종의 친정을 요구하였고, 고종이 이를 받아들임으로써 대원군은 권좌에서 물러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