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병인양요

후니 NO.1 2022. 4. 4.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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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의 배경

ㄱ. 서세동점

19세기 후반 청(아편 전쟁에서 영국에 패해 난징 조약을 체결하고 문호 개방)과 일본(미국의 위협에 굴복하여, 미 · 일 수호 통상 조약을 채결하여 문호 개방)을 개항시킨 서구 열강은 18세기 후반부터 조선에 관심을 보였다. 19세기에는 항해에 필요한 물이나 식량을 구하기 위해 상륙하거나 탐험과 측량을 구실로 우리나라에 접근하여 왔으며, 이후로는 조선에 직접 통상을 요구하였다. 이에 조선 정부는 필요한 물자를 제공하고, 난파된 선박의 선원들을 구조하기도 하였으나 통상 요구는 거절하였다. 

ㄴ. 최초의 통상 요구

우리나라에 최초로 통상을 요구한 나라는 영국의 로드 암허스트호로 통상을 요구하다가 거절당했으며(1832), 프랑스 함대의 제독 세실이 기해박해 때 프랑스 신부의 처형에 대한 책임과 통상을 요구해 오기도 하였다.

ㄷ. 위기 의식의 확산

1860년대를 전후하여 이양선의 출몰이 빈번해졌고, 이 와중에 제국주의 서양 열강들이 제 2차 아편전쟁으로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서양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었다. 또한, 러시아가 베이징 조약을 중재한 대가로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획득함에 따라 조선은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하는 새로운 상황에 직면하였다.

ㄹ. 천주교의 교세 확장과 서양 물품의 불법 유입

대원군이 집권하기 이전부터 천주교의 프랑스 신부들이 국내에 잠입하여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국경 지대인 의주나 동래에는 많은 서양 물품이 불법으로 들어왔다. 이후 천주교는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 1801냔 큰 박해(신유박해)를 받으면서도 19세기에 교세가 점점 확장되어, 흥선 대원군의 집권 당시에는 천주교 신자가 약 2만명에 이르렀다.

ㅁ. 양반 유생의 통상 수교 거부 주장

서양 세력에 대한 경계심이 높아짐에 따라 천주교를 엄금하고 서양 물품이 들어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통상 수교 거부 주장이 유생인 이항로등을 중심으로 강하게 제기되었다.

ㅂ.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지방 관리들에게 이양선의 출현을 경계하도록 명령하는 등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이에 따라 강화도 등 서해안 일대와 한강 하구에 성곽을 수축하였고, 군대 정비와 포대 설치 등 군사력 강화에 힘썼으며, 서양 상품의 유입을 엄금하였다.

● 기해박해(1839년)
1. 천주교의 교세 확장
천주교 조선 교구를 프랑스 외방 선교회가 맡게 되면서, 외방 선교회는 3명의 프랑스 신부를 조선에 파견하였다. 이들의 활동으로 조선의 천주교 신자가 9,000여 명으로 크게 증가하였다.
2. 유교의 제사의식 거부
조선 정부는 천주교가 유교의 제사의식을 거부하고 평등사상을 내세워 신분제를 붕괴시킨다고 하여, 조선에서 포교 활동을 하던 프랑스 신부 3명을 모두 처형하였다.
3. 결과
프랑스는 이를 구실로 조선에 침략하였으나 폭풍 때문에 상륙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이후 천주교에 관대하였던 안동 김씨의 세도 정치 기간중에 천주교의 교세가 확장되면서 천주교가 늘어나고, 다시 프랑스 선교사가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였다.

2. 양요와 통상 수교 거부의 강화

ㄱ. 병인박해(1866)

(1) 원인

1860년 청으로부터 연해주를 차지한 러시아가 제국주의적 남하 정책을 펼쳐 조선의 위기감이 높아지고 있을 즈음, 러시아인들이 두만강을 건너와 통상을 요구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천주교에 관용적인 태도를 보였던 대원군은 국내에 있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알선을 통해 프랑스 세력을 끌어들여 러시아의 남하를 저지하려고 하였다.

(2) 경과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을 통해 프랑스와 관계를 개선하여 러시아의 위협에 맞서기 위한 협상이 실패하였고, 청에서 천주교를 탄압했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이를 빌미로 대원군을 반대하던 유생들과 양반들은 대원군을 강력하게 비판하며, 천주교를 사학으로 규정하여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성리학적 질서에 어긋나는 천주교를 인정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엄청난 부담이였던 대원군은 결국, 이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하였다.

(3) 결과

1866년 봅 서양의 통상 요구를 거부하고, 9명의 프랑스 신부들과 8,000여 명의 천주교들을 체포하여 처형하였다.

 

ㄴ. 제너럴 셔먼호 사건(1866)

병인양요가 일어나기 직전인 1866년 대포로 무장한 미국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평양 부근까지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였다. 통상 개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가 서양 선박의 내항과 통상 요구는 국법에 어긋난다며 이를 거절하고 평화적으로 물러나기를 요구하자, 제너럴 셔먼호의 선원들은 관리를 살해하고 민가를 약탈하거나 조선인을 가두는 횡포를 부렸다. 이에 분노한 평양 군민이 화공으로 배를 불태워 침몰시켰다.

 

ㄷ. 병인양요

(1) 원인

병인박해 때 천주교 박해와 프랑스의 선교사를 처형한 것을 구실로 프랑스는 조선의 문호 개방을 목적으로 무력 침략을 단행하였다.

(2) 경과

1866년 8월,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극동 함대 사령관 로즈제독은 군함 3척을 이끌고 인천 앞바다와 양화진을 지나 서울 근교에 도착하였다. 이에 대원군은 한강 연안 수비를 명령하고, 프랑스 함대는 지형을 조사하고 물러갔다. 같은 해 9월 로즈 제독은 다시 군함 7척에 병력 1,000여 명을 보내 강화도 갑곶진에 침입하여 강화부를 점령하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3) 결과

대원군의 굳은 항전 의지와 한성근과 양헌수가 전국 각지에서 모집한 4,000여 명의 의용군을 이끌고 각각 서울로 진격하는 프랑스군을 문수산성에서 방어하였고, 정족산성에서 프랑스군을 격퇴하였다. 정족산성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군은 11월 11일에 강화도에서 퇴각하면서 강화부 일대를 파괴하고, 외규장각 도서와 은괴등 조선의 귀중한 문화재와 보화를 약탈해 갔다. 또한, 프랑스 선교사를 처벌했다 하여 정부에 막대한 배상금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였다.

 

● 외규장각 도서
1. 규장각은 조선 후기 정조가 즉위한 해(1776년)에 창덕궁에 설치된 왕실 도서관 겸 학술 연구 기관으로 나중에는 정책 연구의 기능까지 담당한 특별 기구였다. 강화도가 광해군 이래 국방상 요지로 중요시되면서 왕실 관계의 중요 도서는 이곳에 보관되어 왔다.
2. 정조 5년에는 강화도에 규장각 외각, 곧 외규장각을 설치하고 각종 중요 도서와 함께 왕실의 중요한 행사를 기록한 의궤 300여 점을 일괄적으로 보관, 관리하게 하였다. 이 외규장각 의궤는 다른 의궤와 달리 어람용으로 특별히 제작되어, 지질과 글씨, 그림이 빼어나 세계적으로 자랑할 만한 민족 문화 유산이다.
3. 순조 때에는 강화도의 외규장각에 1천여 종, 6천여 권의 도서가 보관되어 있었다. 그런데 1866년 병인양요 때에 강화도를 침공한 프랑스 군이 철수하면서, 은괴 19상자와 외규장각 의궤 도서 340여 권을 약탈해 가고, 강화부의 관아 건물, 조선 시대의 행궁과 부속 건물, 외규장각 등을 파괴, 방화하여 나머지 외규장각 도서는 모두 불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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