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정조의 탕평정치

후니 NO.1 2022. 3. 31.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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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력한 탕평책의 실시

 

ㄱ. 배경

사도 세자의 죽음과 이를 둘러싼 시파와 벽파 간의 갈등을 경험한 정조는 영조 때보다 더욱 강력한 탕평책을 추진하였다. 벽파의 압력 속에서 세손 때부터 지위가 불안했던 정조는 즉위 후 벽파를 물리치고 시파를 관직에 고루 기용하면서 왕권의 강화를 시도하였다.

 

ㄴ. 외척 세력 제거 

정조는 각 붕당의 주장이 옳은지 그른지를 명백히 가리는 적극적인 탕평(준론탕평)을 추진하여, 영조 때에 세력을 키워 정조 집권 초기까지 권세를 누려온 척신 · 환관 등을 제거하였다. 이에 영조 때의 탕평파 대신들을 엄격하게 비판하였던 노론과 소론의 일부와 그동안 정치 집단에서 배제되었던 남인 계열의 시파를 기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정조도 붕당 사이의 융화나 붕당 자체의 해체에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 시파와 벽파

시파는 사도 세자의 잘못은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였고, 벽파는 사도 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다.

 

● 시파와 벽파

 

벽파 시파
영조 지지 → 사도 세자의 처형에 동조 → 정치 주도(집권) 정조 지지 → 사도 세자의 처형에 비판 → 정치 주도(집권)
노론 중 강경파(사도 세자 비난) 남인 + 소론 + 노론 일부(안동 김씨) + 서얼
사도 세자 죽음에 관해 당연한 입장 탄력적 학문 → 천주교에 관대
성리학 유일시 → 천주교에 강경 그러나 정조는 천주교를 사교로 규정함

 

2. 왕권 강화의 추진

 

ㄱ. 인재 등용

궁극적으로 붕당을 없애고자 했던 정조는 각 붕당의 입장을 초월해 의리와 명분에 합치되고 능력이 있는 인재를 고루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려 하였다.

 

○ 서얼 출신 중용

정조는 서얼 출신 학자를 규장각 검서관 등 청요직에 기용하고, 공노비의 해방을 추진하는 등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이러한 서얼 우대는 전문직이던 중인 계층을 자극, 철종 때 이들이 소청 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으나 실패하였다.

 

ㄴ. 규장각 육성

규장각을 설피하여 젊고 유능한 인재들이 학문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하고, 이를 통해 붕당의 비대화를 막고 자신의 개혁 정치에 동조하는 정치 세력을 육성하였다. 

 

★ 규장각

규장각은 본래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갖는 기구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정조는 여기에 비서실의 기능과 문한 기능을 통합적으로 부여하고, 과거시험의 주관과 문신 교육의 임무까지 부여하였다. 관원은 규장각의 제학, 직각, 시교 각 1명과 검서관 4명으로 구성되었다. 서적 인쇄를 담당하는 교서관이 규장각에 소속되면서 규장각을 내각이라 하고, 교서관을 외각이라 하였다.

 

ㄷ. 초계문신제의 시행

신진 인물이나 중 · 하급 관리(당하관) 가운데 능력 있는 젊은 관료들을 선발해 규장각에 소속시켜 학문을 연마하게 한 제도이다. 정조는 이러한 젊은 인재들을 직접 챙기며 자신의 세력 기반을 강화시켰다.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 이라 하여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관료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다.

 

ㄹ. 장용영의 설치

정조는 친위 부대인 장용영을 설치하여 각 군영의 독립적 성격을 약화시키고 병권을 장악함으로써 왕권을 뒷받침하는 군사적 기반을 갖추었다.

 

ㅁ. 화성 축성

수원으로 자신의 아버지인 사도 세자의 묘를 옮기고, 화성행궁과 함께 화성을 축성하여 정치적 · 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화성 행차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다.

 

★ 화성(경기 수원)

사적 3호인 수원 화성은 1997년 12월 유네스코 지정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록되었다. 정약용이 설계하였으며 화포를 배치하여 적을 공격할 수 있고, 전통적인 성곽 양식 위에 서양식 건축 기술을 도입하여 축조하였다. 이와 같이 화성은 공학 측면서에 볼 때 동서양의 축성 기술이 집약되어 있고, 과학적이고 실용적인 구조로 견고함을 뽐낸다. 정조는 화성을 자급 도시 · 상업 도시 · 농업 도시 · 군사 도시로 육성하여 개혁 정치를 추진하는 거점으로 삼으려 하였다.

 

○ 시흥환어행렬도

정조가 화성에 다녀오는 중 시흥 행궁에 도착한 모습을 그렸다. 이런 행차를 통하여 정조는 백성들을 직접 만나 여론을 듣고 정책에 반영하려 하였다. 

 

ㅂ. 수령의 권한 강화

정조는 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다.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하였다.

 

ㅅ. 사상 정책

영조의 정책을 계승하여 성리학을 정학으로 받아들이면서도 남인의 고학, 서울 노론의 북학, 불교에서 한 · 당의 유학에 이르기까지 여러 학문을 수용하였다.

 

ㅇ. 신해통공

1791년(정조 15년)에 시전 상인의 독점적 상업 행위를 금지(금난전권 폐지)하고, 사상의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였다. 그리고 장인 등록제인 공장안을 폐지하여 수공업을 활성화시켰다.

 

ㅈ. 기타

1778년(정조 2년)에 만석거와 만년제 등 제언의 수리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제언절목을 제정하였고 또한, 농업 기술 발전에 노력하고, 광산 개발을 장려하였다. 그리고 정리자, 한구자, 생생자(목판) 등 활자도 주조하였다.

 

ㅊ. 문체반정 운동

노론 벽파를 견제하기 위하여 정조에 의해 주도된 문풍 쇄신 운동으로 한문 문체를 개혁하여 순정고문으로 환원시키려 하였다.

 

정조의 문물 제도 정비
1.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2. 또한,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와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 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을 편찬하여 문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 영조와 정조의 탕평 정치

영 · 정조의 탕평 정치는 붕당 간의 세력 균형을 이루면서 왕권을 중심으로하는 정치 질서를 만들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영 · 정조 시기의 탕평 정치는 붕당 사이에 전개된 격렬한 대립을 왕권을 통해 일시적으로 억제하였지만, 붕당 정치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하였다. 결과적으로 정치 권력이 왕과 그 주변의 소수 정치 집단에 집중되었으며, 이는 정조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뒤 19세기 들어 왕권이 약해지자 왕실과 혼인 관계를 맺은 외척에 의한 세도 정치가 전개되는 배경이 되었다. 그러나 영 · 정조는 탕평책을 추진하여 정국을 주도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문물제도를 정비함으로써 18세기 문예 부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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