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흥선대원군 1편

후니 NO.1 2022. 4. 2. 00:36
반응형

1. 흥선대원군의 집권

ㄱ. 국내외 정세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농민 봉기가 빈번하였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 위협이 거제지고 있었다.

ㄴ. 흥선 대원군의 집권(1863~1873)

안으로 사회적 동요가 일어나고, 밖으로 외세의 통상 수교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26대)에 올랐다. 이에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이 흥선 대원군이 되어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을 못마땅해 하던 신정 왕후(고종을 즉위시켜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 대원군에게 정책 결정권을 주어 대원군의 집정을 이루게 함)의 도움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권력을 잡은 흥선 대원군은 과감한 개혁을 통해 나라 안팎의 위기를 타개 하고자 하였다.

○ 대원군
조선 시대에 왕위르 계승할 적자손이나 형제가 없어 종친 중에서 왕위를 이어받을 때 새 국왕의 친아버지를 호칭하던 말이다.

2. 흥선 대원군의 정책 방향

ㄱ. 대내적

흥선 대원군은 우선 권력 구조를 개편하여 세도 정치로 인하여 흐트러진 국가 기강을 바로잡아 민심을 수습하고,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ㄴ. 대외적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기 위하여 통상 수교 요구를 거부하였다.

ㄷ. 전제 왕권 강화책

(1) 인재 등용

60여년 동안 외척으로 세도를 부리며 권력을 장악해 온 안동 김씨 가문을 포함한 세도 가문의 인물들을 정계에서 몰아내고, 당파와 지역, 신분을 초월하여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남인과 북인뿐만 아니라 무신까지도 능력에 따라 인재를 고루 등용하였다. 이러한 인사 정책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와 관련이 있었다.

(2) 정치 기구의 재정비

문무 고관의 최고 협의체로서 군사와 정무를 총괄해 오며 세도 정권의 핵심 권력 기구 역할을 했던 비변사의 기능을 축소 · 격하하여 세도 가문의 힘을 약화시켰고, 의정부와 삼군부의 기능을 부활하여 각각 정치와 군사 업무 일체를 담당하게 하였다.

(3) 법전 편찬

조선 후기에 크게 바뀐 사회 · 경제 변화를 반영하고, 통치 체제의 재정비를 위하여 『대전회통』(조선 시대 법령의 종합판)과 『육전조례』(조선 시대 각 관청이 맡은 일과 시행세칙 정리) 등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였으며, 왕실과 국가의 전례를 정비하였다.

(4) 서원 정리

대원군은 영조의 서원 개혁 정책을 참조하여 지방 양반 세력의 근거지이자 정쟁의 온상으로 인식되어 온 600여 개소의 서원 가운데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없애 버렸다. 이러한 시책은 서원에 딸린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여 국가 재정을 확충하고, 백성에 대한 양반과 유생들의 횡포를 막아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획기적인 조치였다.

◎ 서원의 정리 결과
서원의 철폐에 대해 일반 백성들은 크게 환영하였으나, 유생들은 강력하게 반발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은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하지 않겠다." 는 태도로 이를 위반한 수령을 엄벌하고, 반발하는 유생들을 탄압하며 과감하게 관철시켰다. 양반 유생들의 반발은 훗날 대원군이 퇴진하는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대원군의 서원 철폐
1. 서원은 본래 선현을 제사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누리던 서원은 조선 후기에 이르러 많은 노비와 토지를 소유하였고, 지방 토호의 근거지로서 지역 농민을 사실상 지배하면서 가혹하게 수탈하였다.
2.서원의 폐단을 인식한 대원군은 1865년 노론 세력의 본거지로 많은 물의를 일으킨 만동묘(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지내던 묘)를 철폐하고, 1871년 '철원 매주' 즉, 서원을 철폐하고 위패인 신주를 묻을 것을 명하였다. 사액서원이라 하더라도 1인 1원 원칙에 의해 47개소만 남기고 모두 철폐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지방 유생들은 광화문으로 몰려와 상소를 올리면서 결렬하게 반대하였다.
3. 서원 철폐는 왕권 강화와 국가 재정의 확충, 민생 안정 등 다양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개혁이었지만, 이를 반대하는 보수적 유생들과의 대립으로 흥선 대원군은 큰 정치적 부담을 안게 되었다. 이는 훗날 대원군의 하야를 촉구하는 빌미가 되었다.

(5) 경복국 중건

㉠ 중건 목적

대원군은 실추된 왕실의 권위와 위엄을 다시 높이기 위하여, 임진왜란 때 불탄 후 방치되었던 경복궁 중건 사업을 시작하였다.

㉡ 공사비 마련

그는 막대한 공사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집집마다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여 부농층뿐만 아니라 빈민에게도 큰 고통을 주었고, 당백전을 남발함으로써 화폐 가치가 떨어지고 물가가 뛰어올라 농민들의 생계를 위협하며 경제적 혼란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그리고 부족한 목제를 확보하기 위해 양반들의 묘지림까지 벌목하고, 많은 백성들을 궁권 공사장에 동원하여 양반 지배층과 농민 모두에게 원성을 사기도 하였다. 이외에 토지 1결당 쌀 1두를 거두는 결두전과 통행세인 성문세도 징수하였다.

㉢ 완공

경복궁은 8년 만인 1872년에 완공되어 왕실의 위용을 들어냈지만, 나라 재정이 어려운 가운데 무리하게 진행되어 백성들의 반감을 샀다. 또한, 대원군은 경복궁 이외에 의정부와 6조 관아 및 도성과 북한산성도 다시 짓거나 수리하였다.

◎ 원납전과 당백전
원납전의 본래의 뜻은 '스스로 원하여 바치는 돈'이었으나 실제로는 각 고을 단위로 할당량이 부과되어 관리나 부호들에게 강제로 징수한 기부금이였다. 당백전은 당시 통용되던 상평통보의 100배 가치에 해당하는 고액 화폐였으나, 실질 가치는 상평통보의 5~6배에 지나지 않아 화폐 가치의 하락과 쌀값이 6배 폭등하는 물가 상승의 원인이 되어 유통 경제가 혼란해졌다.

 

반응형

'한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병인양요  (0) 2022.04.04
흥선대원군 2  (0) 2022.04.03
정조의 탕평정치  (0) 2022.03.31
영조의 탕평정치  (0) 2022.03.30
탕평론의 시작과 숙종  (0) 2022.03.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