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영조의 탕평정치

후니 NO.1 2022. 3. 3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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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기의 탕평책

ㄱ. 탕평 교서 발표

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의 교서를 발표하고, 노론의 우위를 인정하면서 소론이나 남인도 번갈아 등용하는 탕평책을 실시해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오히려 정국을 더욱 어지럽게 하였다.

ㄴ. 영조의 정통성 논란

소론과 남인의 일부 강경파는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노론 정권에 반대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키기까지 하였다.

 

○ 이인좌의 난

1728년(영조 4년) 소론 강경파와 남인 일부가 경종의 죽음에 영조와 노론이 관계되었다고 하면서 영조의 탕평책에 반대하여 일으킨 반란이고, 전국적인 조직을 갖춘 무장 봉기였다. 중소 상인과 노비를 규합하여 청주에서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한성으로 북직하다가, 안성과 죽산 전투에서 병조 판서 오명환이 지휘하는 관군에게 패하였다.

 

2. 탕평파의 정국 주도

ㄱ.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계기로 붕당 간의 관계를 다시 조정하여 왕과 신하 사이의 의리를 확립할 필요가 있음을 절감하였다.

ㄴ. 탕평파 육성(완론탕평)

영조는 병권을 장악하고 붕당을 없애자는 자신의 논리에 동의하는 탕평파를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다. 영조는 강화된 왕권을 바탕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균형을 조정하여 정쟁을 억제하고 정국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ㄷ. 붕당의 기반 제거

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 각 붕당의 사상적 지주였던 산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그들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다. 아울러 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던 이조 전랑의 권한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하고, 3사의 관리를 선발할 수 있게 해주던 관행을 없앴다(1741). 그러나 이조 전랑의 후임자 인사권은 이후 정조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되었다.

ㄹ. 국왕 중심의 탕평 정치

영조가 탕평 정치를 실시하면서 왕은 정국의 운영이나 이념적 지도력을 비롯하여 거의 모든 부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붕당의 정치적 의미는 차츰 엷어졌다. 이에 정치 권력은 왕과 탕평파 대신 쪽으로 집중되었다.

 

3. 영조의 개혁 정치

ㄱ. 개혁 정치의 목적

정국이 안정되자 영조는 민생 안정과 산업 진흥을 위한 개혁을 추진하였다.

ㄴ. 균역법 시행

백성들의 군역 부담을 줄여 주기 위하여 2필의 군포를 1필로 감하는 균역법을 시행하였다(1750).

ㄷ. 군영 정비

훈련도감 · 금위영 · 어영청 세 군문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추었다.

ㄹ. 형벌 제도 정비

가혹한 형벌을 폐지하고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하였다.

ㅁ. 신문고 부활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고자 신문고를 부활하였다.

ㅂ. 법전 체계 재정리

제도와 권력 구조의 개편 내용을 정리하여 『속대전』, 『속오례의』 등을 편찬함으로써 법전 체계도 시대의 변호에 맞게 재정리하였다.

ㅅ. 노비공감법

노비의 공납품을 반으로 줄인 제도를 말한다. 이 제도에 따라 종래 16세~61세 사이의 노가 내던 포 2필은 1필로, 비가 내던 1.5필은 반필로 줄었다.

ㅇ. 기로과

국왕이나 왕비 · 대비 · 대왕대비 등의 나이가 60세 또는 70세가 되었을 때, 이를 경축하기 위해 실시한 과거 시험을 말한다.

ㅈ. 청개천 준설

도시를 재정비하기 위하여 청개천을 준설하였다.

ㅊ. 수성윤음 반포

1751년(영조 27년)에 영조 스스로 도성민과 함께 도성을 사수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한 명령을 반포하였다.

4. 영조 탕평책의 한계

ㄱ. 왕권에 의한 정쟁 억제

영조의 탕평책이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다.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하였다. 53년간 재위한 영조 말년에는 탕평책의 후원 세력으로 중용되었던 외척 세력들의 힘이 강해지는 문제점도 들어났다.

ㄴ. 붕당 세력의 불균형

한때 탕평의 원리에 의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등 소론 강경파가 자주 변란을 일으켰으며 소론과 연결괸 사도 세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임오화변(영조 38년, 1762)을 계기로 소론의 정치적 입장은 약화되고 영조를 지지한 노론이 정국을 주도하였다.

 

○ 나주 괘서 사건(영조 31년, 1755)

영조가 탕평책을 실시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노론의 세력이 커지자 소론이 이에 불만을 품고 정변을 일으켜 세력을 만회하여는 사건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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