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변질의 배경
ㄱ. 사회 경제적 변화
17세기 후반 이후 상품 화폐 경제가 발달함에 따라 정치 집단 사이에서 상업적 이익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이를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졌다.
ㄴ. 정치적 쟁점의 변질
정치적 쟁점도 예론과 같은 사상적인 문제에서 군사력과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것으로 옮겨갔다.
ㄷ. 향촌 사회의 변동
향촌 사회에서는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에 따라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되어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지게 되었다.
2. 변질의 양상
ㄱ. 일당 전제화
숙종(1674~1720) 때에 이르러 붕당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던 붕당 정치 형태가 무너졌다.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하게 전환하는 환국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서인과 남인이 번갈아 집권하면서 상대방에 대한 탄압과 보복이 반복되었다. 이로써 상대 세력과의 공존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다.
ㄴ. 서인의 분열
인조 반정으로 정권을 잡은 서인은 정책의 수립과 상대 붕당의 탄압 과정에서 노장 세력과 신진 세력 간에 갈등이 깊어지면서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이후 노론과 소론은 남인과 정국의 주도권을 놓고 대립하였고, 갑술환국(갑술옥사, 숙종 15년, 1698)으로 남인이 정계에서 완전히 밀려난 뒤에는 노론과 소론 사이의 대립으로 정국의 반전이 거듭되었다.
○ 경신환국(경신대출척, 숙종 6년 1680)
남인인 영의정 허적이 어용 작물을 사용한 사건으로 왕의 불신을 사게 되었는데, 이때 갑인예송으로 실각한 서인의 김석주, 송시열 등이 허적의 서자 허견 등이 역모를 꾸몄다고 고발하여 허적, 윤휴 등을 사사시키고 나머지 남인들을 대거 축출하여 서인 정권을 다시 수립한 사건을 말한다. 이를 계기로 붕당 정치의 원리가 무너지고, 상대 세력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나타났고, 이후 남인의 처벌 문제를 둘러싸고 서인은 강경론을 편 송시열 등은 노론으로, 온건론을 편 윤증 등은 소론으로 각각 분열되었다.
○ 노론과 소론
처음에는 서인과 남인이 격렬하게 대립하였으며, 나중에는 서인에서 갈라져 나온 노론과 소론이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노론은 송시열을 비롯한 노장파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대의명분을 존중하고, 민생 안정을 강조하는 결향을 보였다. 반면에 소론은 윤증을 비롯한 소장파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실리를 중시하고, 적극적인 북방 개척을 주장하는 경향을 보였다. 이와 같은 당파 간의 대립은 성리학적인 명분론의 강화를 둘러싼 찬반양론의 대립과도 관련이 있었다.
3. 붕당 정치의 변질 결과
ㄱ. 붕당 정치 원리 붕괴
숙종 때 환국을 거치면서 붕당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인정하지 않고 특정 붕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가 나타남에 따라, 집권 붕당이 비변사의 고위 관직을 독점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이로써 정치 권력은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었으며, 언른 기관이나 재야 사족의 정치 참여가 점차 어려워짐에 따라 붕당 정치의 기반도 무너졌다.
ㄴ. 왕의 환국 주도
환국은 붕당 간의 대립에 왕이 직접 나서서 어느 한 집단을 편파적으로 등용하거나, 다른 집단을 제거하는 정치 변동에 깊숙이 개입함으로써 나타났다. 이와 같이 환국을 왕이 직접 나서서 주도함에 따라 왕실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졌다.
ㄷ. 3사와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 감소
3사와 이조 전랑은 환국이 거듭되는 동안 자기 당의 이익을 직접 대변하는 역할을 하여 정치적 비중이 줄어들었다.
ㄹ. 벌열 가문의 정권 독점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속에서 정권은 몇몇 벌열 가문에 의해 독점되었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공론에 의해 문제를 처리하기보다는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ㅁ. 양반층의 분화
양반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양반은 정치적으로 몰락하여 갔다.
ㅂ. 서원과 사우의 남설
여론을 조성하여 붕당 정치의 중요한 본거지로서의 역할을 하던 서원 본래의 모습에서 벗어나, 특정 가문의 인물에게 봉사하는 기능만 가지는 사우를 세워 놓고 서원이라고 통칭하는 예가 급증하였다.
● 붕당 정치
(1) 붕당은 학파적 성격과 정파적 성격을 동시에 가진다. 조정에서 어떤 정책을 논의 할 경우, 각 붕당은 그 정책이 이론적으로 타당한지 검토하고, 여론을 광범위하게 수렴하면서 토론을 벌였다. 이렇게 수렴된 여론을 공론이라 하는데, 공론이 중시되면서 합좌 기구인 비변사와 언론 기관인 3사의 기능이 중시 되었다. 재야에서 공론을 주도하는 지도자로서 산림이 출현하였고, 서원이나 향교가 지방 사족의 의견을 모으는 수단으로 기능하였다.
(2) 그러나 붕당이 적극적으로 내세운 공론도 백성의 의견을 반영하는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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