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병자호란

후니 NO.1 2022. 3. 26.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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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병자호란(인조 14년, 1636)

ㄱ. 원인

(1) 청의 군신 관계요구

이후 후금은 세력을 더욱 확장하여 국호를 청이라 고치고, 심양을 수도로 정한 뒤 스스로 황제라 칭하면서 조선에 대하여 군신 관계를 요구해 왔다.

(2) 주화론과 주전론의 대립

군신 관계를 맺자는 청의 요구에 조선에서는 국가의 안위를 위해 외교적 교섭을 통하여 문제를 해결하자는 주화론과 청의 요구에 굴복하지 말고 전쟁까지도 불사하자는 주전론이 대립하였다.

 

☆ 주전론과 주화론

구분 주전론 주화론
주장 명분론에 입각하여 청의 압력에 즉시 물력으로 응징하자고 주장 외교 담판으로 청의 침략을 저지한 다음에 내정 개혁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자는 현실론 주장
성향 내의 명분 중시, 화이론 현실적, 실리적
사상 성리학 성리학, 양명학
인물 김상헌, 유계, 정온, 3학사 최명길, 이귀, 홍서붕

ㄴ. 경과

(1) 청의 침입

결국 대세가 주전론으로 기울자, 청 태종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다시 침입해 왔다(1636). 이를 병자호란이라 한다.

(2) 최명길의 주화론

청 태종은 10만의 대군을 이끌고 한양을 점령하였다.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여 45일 간을 청군에 대항하였으나, 사태가 기울어져 주화파인 최명길 등의 주장에 따라 청과의 화의를 맺었다.

 

● 남한산성

신라 시대에 쌓은 흙성을 1621년 광해군 때에 만주에서 새롭게 세력을 키우던 후금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하여 석성으로 다시 쌓았다. 이후 인조는 후금의 군사적 압박이 거세지자 대대적으로 보강 · 개축하였는데, 성곽뿐만 아니라 국왕이 거처하기에 충분한 시설을 갖추었다.

 

ㄷ. 결과 

조선은 청의 요구를 받아들여 명과 국교를 단절하고 굴욕적인 군신 관계를 맺게 되었고, 두 왕자(소현세자, 봉림대군)와 강경한 척화론자(3학사, 윤집, 홍익한, 오달제)들이 인질이 되어 청의 수도로 잡혀갔다. 또한, 사대의 예에 따라 조선에 막대한 조공품을 요구하였다.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화의가 성립된 뒤에 각 도처에서 의병을 조직하여 항전하였으며, 임경업은 명과 연결하여 청을 치려고 계획하였으나 실패하였다.

 

○ 삼전도비

병자호란 때 청 태종이 조선 인종의 항복을 받은 후 자신의 공덕을 자랑하기 위해 서울 송파구 석촌동에 세운 기념비이다. 

 

○ 김상헌과 최명길

청에 패배한 인조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과 함께 항복 문서를 청 태종에게 바쳐야 했다. 외교 문서를 담당한 예조판서 김상헌이 문서를 작성해야 하였지만 청을 오랑캐로 여겨 온 김상헌은 항복 문서를 쓰려고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한 최명길이 문서를 완성하였다. 최명길의 글을 읽은 김상헌은 화가 나서 그 자리에서 문서를 찢어 버렸다. 그러나 최명길은 묵묵히 찢어진 종이를 모으며, " 찢은 사람도 충신이고, 주워 모아 다시 쓴 사람도 충신" 이라고 하였다.

2. 호란의 영향

ㄱ. 서북 지방의 황폐화

청군의 침입은 왜군의 침입에 비하여 기간이 짧았고, 지역적으로도 일부에 한정되었기 때문에 피해가 적은 편이였다. 그러나 청군이 거쳐 간 서북 지방은 약탈과 살육에 의하여 황폐해졌다.

ㄴ. 정신적 충격

무엇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매우 컸다. 그동안 조선에 조공을 바쳐 왔고, 조선에서도 오랑캐로 여겨 왔던 여진족이 세운 나라에 거꾸로 군신 관계를 맺게 되고, 임금이 굴욕적인 항복을 했다는 사실은 조선인들에게 커다란 충격이었다.

ㄷ. 북벌론 제기

이후 임진왜란 때 도와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 청에 복수하여 오랑캐에 대한 수치를 씻자는 북벌 운동이 전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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