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북벌 운동과 나선 정벌

후니 NO.1 2022. 3. 27.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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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벌론의 대두

ㄱ. 청과의 관계

병자호란이 끝나고 청과 군신 관계를 맺은 조선은 겉으로는 청에 사대의 예를 취하는 형식의 외교를 추진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청을 배척하여 은밀하게 국방에 힘을 기울이면서 청에 보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ㄴ. 북벌 준비

(1) 효종

청에 볼모로 잡혀 갔다가 돌아와 왕위에 오른 봉림 대군(효종)은 적극적인 북벌 운동을 전개하였다. 청에 반대하는 입장을 강하게 내세웠던 송시열(효종의 스승), 송준길, 이완 등의 서인 세력을 중용하여 친청파 대신들을 제거하였으며, 어영청 등 군대를 양성하고 성곽을 수리하는 등 북벌을 준비했다. 그러나 청의 세력이 점점 커지고 늘어나는 군비로 재정이 어려워진데다가 효종이 죽자 북벌 계획은 중단되고 말았다.

(2) 숙종

청의 정세 변화를 이용하여 윤휴를 중심으로 북벌의 움직임이 제기되기도 하였으나 현실적으로 북벌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3) 북벌론의 폐단

북벌론은 패전의 책임을 져야 할 처지였던 서인들이 계속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인조는 서인 중 일부 소장파들의 강경한 척화 주전론이 청의 침략을 불러들였다고 생각하여 일부 남인을 등용하였다. 이에 서인들은 북벌론을 주장하면서 반대 세력들의 진출을 견제하려 하였다.

 

○ 북벌론

청에 굴복한 이후에도 조선의 지배층은 청을 오랑캐로 여겨 중화의 정통 계승자는 조선이라는 문화적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북벌론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오랑캐에 당한 치욕을 씻고 명의 원수를 갚자는 주장이다.

 

○ 대보단과 만동묘

대보단(숙종 30, 1704)은 명나라의 은의를 보답하는 뜻으로 창덕궁 금원 옆에 설치하여 명의 태조, 신종, 의종의 제사를 받든 사당이고, 만동묘(숙종 43, 1717)는 명나라 황제의 신위를 모신 사당으로 화양서원 송시열의 제자들이 청주 황야동에 세웠다. 만동묘는 1865년(고종 2년)에 대원군이 철폐했으나 1847년(고종 11년)에 부활했다.

 

○ 북벌론의 쇠퇴와 북학론의 대두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 수준이 높은 조선이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준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자는 것이었다. 이 주장은 명이 멸망함으로써 중화로서의 위치는 잃었으나, 조선이 명의 문화를 계승한 유일한 민족이라는 소중화 의식에 바탕을 둔 것이다. 그러나 청에 다녀온 사신들 사이에서 점차 청의 발달된 문물을 배우자는 북학론이 대두하였으며, 이들은 후에 북학파를 형성하고 조선 사회를 변화시키려고 하였다.

 

2. 나선 정벌

ㄱ. 원인

조선에서 북벌 운동이 무르익어 가고 있을 때, 시베리아 지방에는 러시아 세력이 밀려왔다.

ㄴ. 경과

러시아 세력의 침략으로 위협을 느낀 청은 정벌군을 파견하고, 아울러 조선에 원병을 요청하였다. 이에 조선에서는 효종 때 변급(1654), 신유(1658) 등이 두 차례에 걸쳐 조총 부대로 출동하여 큰 성과를 거두고 돌아왔다.

ㄷ. 의의

나선 정벌에서의 승리는 조선 총수병의 실력을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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