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란의 영향
ㄱ. 왜란의 승리 요인
(1) 잠재적 역량 우월
왜란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민족이 지닌 잠재적 역량이 우월했기 때문이다. 즉, 관군 차원의 우리 국방 능력은 일본에 뒤졌으나, 전 국민적인 차원의 국방 능력은 일본을 능가하였다.
(2) 문화적 우월감
우리 민족은 신분의 귀천이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문화적인 우월감에 가득 차 있어서 자발적인 전투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한 정신력이 국방 능력으로 작용하여 왜군을 격퇴시킬 수 있는 힘이 되었다.
(3) 무기와 전술 우수
조선 수군은 배와 대포의 성능에서 일본을 능가하였고, 화공술이 뛰어났다.
ㄴ. 국내적 영향
(1) 정치적 영향
왜란 중(1594)에는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삼수병을 두고 무예를 조련하였으며, 지방에도 양천혼성군인 속오군을 두어 교관을 파견해 무예를 가르쳤다. 단순히 군무를 협의하던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되면서 왕권을 제약하였다.
(2) 경제적 영향
7년의 전쟁 기간 동안 국토는 황폐해졌고, 왜군에 의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었을 뿐만 아니라 기근과 질병으로 인하여 인구가 크게 줄었다. 여기에 세금을 거둘 때 쓰는 토지 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 재정이 궁핍해졌고 식량이 부족해져 국가 운영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3) 사회적 영향
나라의 재정을 보충하기 위하여 부유층으로부터 돈이나 곡식을 받고 팔았던 명예직 임명장인 공명첩이 대량으로 발급되어 신분제의 동요를 가져왔으며, 이몽학의 난(선조 29, 1596년 왕실 서얼 출신인 이몽학이 민심의 불만을 선동하여 충청도에서 일으킨 난)과 같은 민란이 도처에서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한, 수만 명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
(4) 문화적 영향
일본군의 약탈과 방화로 불국사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서적, 사고(전주 사고만 남고 모두 소실), 그림 등 기타 수많은 문화재가 손실되었고, 숭명사상이 더욱 굳어졌으며, 이 시기에 고추, 담배, 토마토 등이 전래 되었다.
ㄷ. 국외적 영향
(1) 일본의 중세 문화에 자극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정권이 무너지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도쿄)에 새로운 막부를 설치하여 정권을 교체하였다. 그리고 전쟁 중에 일본은 조선에서 활자, 그림, 서적 등을 약탈해 갔고, 성리학자와 우수한 활자 인쇄공 및 도자기 기술자 등을 포로로 잡아갔다. 이는 일본의 성리학과 도자기 문화를 발전시키는 토대가 되었다.
(2) 여진족의 성장
조선과 명이 일본과 싸우는 동안 북방의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하여 동아시아의 정세가 크게 변화하였다. 그 후 명이 쇠약해지고 청이 건국되어 명 · 청이 교체 되었다.
(3) 국교 단절
왜란 이후에 조선은 일본과 교류를 중단하였다. 그러나 에도 막부가 간청하자 포로를 돌려받고 국교를 재개하였다. 또한 막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통신사를 파견함으로써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 되었다.
◎ 일본에 잡혀간 도자기 기술자
이삼평을 비롯한 도자기 기술자 155명이 일본에 끌려가 일본 도자기의 발달에 결정적으로 기여하였다. 이에 임진왜란을 도자기 전쟁이라고도 한다. 1616년 도자기 원료인 고령토를 찾은 이삼평은 엄중한 감시를 받으며 아리타 이마리 도자기를 만들었다. 아리타 이마리 도자기는 명이 명망하며 중국에서 자기 생산이 주춤하던 틈을 타 유럽에 팔려 나가 큰 인기를 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