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의병의 승리
ㄱ. 의병의 성격
이 무렵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조직된 의병이 왜군과 싸워 향촌 사회를 지켜냈다.
ㄴ. 의병의 구성
의병은 주로 전직 관리와 사림양반 그리고 승려들이 조직하고 지도하였으나, 그 중심에는 목숨을 걸고 싸운 농민들이 있었다.
ㄷ. 의병의 전술
곽재우, 조헌, 유정 등의 의병장들은 향토 지리에 밝은 이점을 활용하고 그에 알맞은 유격 전술을 구사하여 적은 병력으로도 왜군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ㄹ. 관군에 편입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는 이후 관군에 편입되어 조직화되었고, 관군의 전투 능력도 한층 강화 되었다.
ㅁ. 주요 의병장의 활약
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은 왜군이 가장 먼저 침입한 경상도 지역이다.
(1) 정문부
함경도 경성에서 거병하여, 경성 · 길주를 탈환하였다.
(2) 조헌
충청도 옥천에서 거병하여, 금산에서 700명의 의사와 함께 전사하였다.
(3) 고경명
전라도 담양에서 거병하여 수원에서 활약하고, 진주성 전투 때 전사하였다.
(4) 김천일
전라도 나주에서 거병하여, 금산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5) 김덕령
전라도 담양에서 거병하여, 광주 · 남원에서 활약하였다.
(6) 곽재우
경상도 의령에서 거병한 최초 의병장(홍의장군)으로 김시민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7) 서산 대사 휴정
모향산에서 일어나 전국의 승병 운동을 일으키게 하였다.
(8) 사명 대사 유정
금강산에서 승병을 일으켜 동해안에서 활동하였고 전후에는 대일 사신으로 활약하였다.
☆ 북관대첩비
임진왜란 당시 왜군 800여 명을 전사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던 의병장 정문부의 승전을 기리기 위해 1709년 숙종이 함경북도 길주군에 세운 비석이다. 이 비석은 러 · 일 전쟁 중 일본군에 의해 옮겨져 도교의 야스쿠니 신사 한쪽 구석에 방치되어 있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정부가 2005년 6월 일본 정부에 북관대첩비 반환을 공식 요청하여 돌려받았다. 현재 이 비석은 2006년 2월에 원래 있었던 북한으로 인도하였고, 경복궁에는 복제비를 건립하였다.
2. 전란의 극복과 영향
ㄱ. 왜란의 극복
(1) 왜군에 대한 반격
수군과 의병의 활약으로 조선은 전쟁 초기의 수세에서 벗어나 반격을 시작하였다. 아울러 명의 원군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조 · 명 연합군은 평양성을 탈환(유성룡, 1593.01) 하였으며, 관군과 백성들이 합심하여 행주산성(권율)과 진주성(김시민) 등에서 적의 대규모 공격을 물리쳤다. 이후 명과 경상도 해안으로 밀려난 왜군 사이에 휴전 협상이 이루어졌다.
(2) 조선의 전열 정비
휴전 기간 중 조선은 전열을 정비하여 왜군의 완전 축출을 준비하였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고,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도 개편하였으며, 화포를 개량하고 조총도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다.
ㄴ. 정유재란의 발생
(1) 발생 원인
전쟁이 소강 상태에 이르고, 휴전 회담이 열렸으나 서로의 주장이 달라서 3년여에 걸친 명과 일본 사이의 휴전 회담이 결렬되자 왜군이 다시 침입해왔다(1597). 이를 정유재란이라 한다.
(2) 조 · 명 연합군의 승리
조 · 명 연합군이 직산에서 왜군의 북상을 막은 뒤, 남쪽으로 밀어냈다(직산전투).
(3) 이순신의 승리
이순신이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자 왜군은 남해안 일대로 다시 후퇴하였다(명량대첩). 패주하는 왜선 수백 척을 노량 앞바다에서 최후의 일격을 가하고 이순신은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하였다(노량대첩).
(4) 전쟁의 종결
전세가 불리해진 왜군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였다.
※ 이순신의 3대첩
한산도 대첩(1592), 명량 대첩(1597), 노량 대첩(1598)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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