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조선의 정치 1편

후니 NO.1 2022. 3. 16. 2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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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훈구파와 사림파

 

ㄱ. 훈구파

(1) 성립

고려 말 유교적 이상 국가 건설을 꿈꾸었던 급진 개혁파 신진 사대부들은 조선 건국 이후 개국 공신이 되어 조선의 정치와 사회를 이끌면서 지배 세력으로 뿌리를 내렸다. 이들은 공훈을 인정받거나 왕실과 혼인하여 세력을 강화하였는데, 뒤에 사림이 등장하면서 훈구라고 불렀다.

 

(2) 특성

세조 이후의 공신들과 그 후예들로 중앙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고 실권을 장악한 훈구 세력은 유교적 정치 이념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적 부국강병을 추구하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민족적이며 자주적인 성격의 민족 문화가 발전하였다.

이처럼 훈구 세력은 조선 초기 각종 제도와 문물을 정비하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특권 세력으로 변모하였다. 특히, 세조의 집권에 협력한 공신들이 고위 관직을 독점하였고 이들은 정치적 실권을 세습하고 15세기 이래 늘어난 농업 생산력과 이를 배경으로 발달한 상공업의 이익을 독점 하고자 하였다. 또한, 서해안의 간척 사업과 대규모의 토지 개간이나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아 농장을 확대 하였다. 대외무역에도 관여하였고, 공물의 방납을 통해서도 경제적 이득을 취함으로써 사회 혼란을 가져왔다.

 

ㄴ. 사림파

(1) 성립

고려 말 신진 사대부 중 성리학자 정몽주 계열의 인물들은 조선이 건국되자 향촌에 정착하였다. 이들의 맥을 이은 사림은 15세기 중반 이후 중소 지주적인 배경을 가지고 성리학에 투철한 지방 사족으로 영남과 기호 지방을 중심으로 성장하였다. 

(2) 특성

사림 세력은 훈구 세력이 중앙 집권 체제를 강조하였던 데 비하여 농민 교화를 위한 향촌 자치를 내세웠고,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특히, 왕과 대신들의 잘못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언로의 개방을 주장하였다. 또한, 중앙의 권력을 바탕으로 향촌 사회를 장악하려는 기존의 훈구 세력에 대응하여 자신들의 자치적인 세력을 기반을 쌓으면서 성리학적 향촌 질서를 세우려 하였다.

 

ㄷ.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

(1) 훈구세력의 비리와 부정

조선은 건국 후 약 100여 년 동안 나라의 기틀을 다지는데 힘을 썼으나 점차 훈구 세력이 권력을 독점하면서 문제점이 드러났다. 훈구 세력은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운 신하들로 대를 이어 고위 관직을 독점 하였고, 권세를 이용하여 농장을 확대하였다. 더구나 수취 체제가 문란해지고, 빈민을 구제하기 위해 시행한 환곡이 고리대로 변질 되면서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다.

(2) 사림의 중앙 정계 진출

15세기 말 성종은 훈구 세력의 비대화를 막기 위해 김종직을 비롯한 그 문인들을 등용하였는데, 향촌 사회에서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던 사림은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성리학적 가르침을 충실하게 적용하는 개혁을 추구 하였다.

(3) 훈구와 사림의 대립

성종 때 중앙에 진출한 사림 세력은 주로 전랑과 3사의 언론과 학술 기관에 배치되어 정치 권력에 참여하였다. 그리고 훈구 세력의 비리와 부정을 감시하고 성리학 윤리에 어긋나는 일들을 비판하며. 훈구 세력의 일방적인 독주를 견제하였다. 성종이 죽고 연산군이 즉위하자, 훈구 세력은 대대적인 공세를 펴면서 수만은 사림들을 제거하는 사화를 일으켰다.

 

ㄹ. 사화의 발생

(1) 무오사화(연산군 4년, 1498)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을 그의 제자인 김일손이 사초에 올렸는데, 이것이 세조의 즉위를 비난한 것이라고 트집 잡아 훈구파가 사림에 대한 탄압을 가하였다.

 

(2) 갑자사화(연산군 10년, 1504)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의 폐비사사 사건을 구실로 궁중파가 일반 훈신을 몰아내었다. 그 결과 연산군은 언론을 극도로 탄압하고 재정을 낭비하는등 폭압적인 정치를 단행하다가 결국 박원종, 성희안, 유순정 등이 주도한 중종 반정으로 쫒겨났다(1506).

 

(3) 기묘사화(중종 14년, 1519)

 

㉠ 배경

중종(1506~1544)은 반정을 주도하며 정권을 잡은 훈구 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하여 사림 중에 명망이 있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을 주요 관직에 다시 기용하여 유교 정치를 일으키려 하였고, 중용된 조광조는 본격적인 개혁 정치를 단행하였다.

조광조의 개혁 정치

천거 받은 인재를 과거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의 현량과를 실시하여 지방의 유능한 사림을 관직에 대거 등용시켰다. 이들은 3사의 언관직을 차지하고 자신들의 의견을 공론이라 표방하면서 급진적 개혁을 추진하였다.

㉢결과

조광조의 급진적인 개혁 정치에 대한 공신들의 반발로 다시 사화가 일어나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 세력은 대부분 제거 되었다.

 

※ 조광조의 개혁 정치

조광조를 비롯한 당시의 사림은 성리학 정치(유교적 도덕 정치)를 내세우면서 경연과 언론 활동의 활성화, 중종반정 때의 공신 중 실제로 공이 없는데도 공신으로 책봉된 76명을 공훈에서 삭제한 위훈삭제, 훈구 세력의 경제적 기반 축소, 도교 행사 기관인 소격서 폐지, 소학 보급, 공납의 폐단 시정, 유향소폐치, 향약의 전국적 시행 등 성리학적 가치를 주요 정책으로 삼았다.

 

(4) 을사사화(명종 원년,1545)

 

㉠원인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 왕후가 수렴청정을 시작하였는데, 이때 인종의 외척인 대윤(윤임)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윤원형)이 왕위 계승 문제로 외척끼리 반목과 권력 다툼이 있었다.

 

㉡결과

윤원형을 비롯한 왕실 외척인 척신들이 대윤(윤임)을 몰아내고 정국을 주도하였고, 사람의 세력은 또 다시 정계에서 밀려났다. 그러나 이를 계기로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여 향촌 사회에서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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