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간회 결성
ㄱ. 배경
1926년 7월,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일부 사회주의 세력이 연합하여 조선 민흥회를 만들었으며, 11월에는 사회주의 단체인 정우회가 '정우회 선언'을 통해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와 민족 협동 전선을 만들 것을 제안함으로써,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 간의 연합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ㄴ. 결성
조선 민흥회에 속한 민족주의자들이 사회주의 세력이 제안한 민족 협동 전선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제 강점기 국내의 대표적인 민족 협동 전선이자, 최대 규모의 항일 단체인 신간회가 창립(1927)되었다.
ㄷ. 창립 대회
일제 축출을 목표로 이념과 노선을 초월하여 민족 유일당을 건설한 언론계 · 불교계 · 천도교계 · 기독교계 등 비타협적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대표들은 1927년 2월 서울에서 신간회 창립 대회를 열고 회장에 이상재, 부회장에 홍명희를 선출하였다.
ㄹ. 강령 채택
농민 · 노동 · 청년 단체 회원들이 대거 가입한 신간회는 [우리는 정치 · 경제적 각성을 촉구한다.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한다. 우리는 기회주의를 일체를 부인한다.]라는 3대 강령을 채택하였다.
ㅁ. 성장 발전
신간회는 창립되자마자 대중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 조선 청년 총동맹, 조선 농민 총동맹, 조선 노동 총동맹 등 대중 단체 회원들이 개인 자격으로 적극 참여하였다. 그리하여 1928년 말에는 143개의 지회에 회원수 4만 명에 이르는 전국적 규모의 정치 · 사회 단체로 성장하였으며, 일본 및 만주까지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
ㅂ. 자매 단체
정종명, 김활란 등 여성들도 사회주의 계열과 기독교 계열 중심으로 대통합을 이루어 신간회의 자매 단체로 근우회를 결성하였다.
2. 신간회의 활동
ㄱ. 순회 강연회 개최
각 지방의 지회를 중심으로 순회 강연회나 연설회를 개최하여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고, 일제 식민 통치의 야만성을 규탄하는 등 민족의 권익을 지키기 위해 힘을 기울였다. 그리고 노동 야학 참여, 교양 강좌 등 민중 계몽 활동을 벌였다.
ㄴ. 다양한 활동 전개
노동 운동(노동 쟁의)과 농민 운동(소작 쟁의)을 지원하고, 청년 운동 · 여성 운동 · 형평 운동 등과도 조직적으로 연계하는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외에도 동맹 휴학 지원, 만주 독립군 지원, 수재민 구호 활동, 만주 동포 옹호 운동 등을 전개하여 민족의 의사를 대변하는 대표 기구로 자리 잡았다.
ㄷ. 합법적 활동 공간 확보
사회주의 운동은 일제가 강력히 탄압하였기 때문에 합법적인 활동 공간의 확보가 절실히 필요하였는데, 사회주의자들의 신간회 참여로 사회주의 운동 진영은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민족 운동의 합법적 공간을 확보하고 활동할 수 있었다.
ㄹ. 복대표 대회
일제의 방해와 탄압으로 신간회의 정기 대회를 열 수 없게 되자, 일부 지방에서는 몇 개의 지방 지회를 묶어 대표를 뽑아 정시 대회를 대신하는 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ㅁ. 진상 조사단 파견
1929년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진상 조사단을 보내고 민중 대회를 열어 일제의 한국 학생에 대한 차별 조치를 강력히 규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방해로 실행되지 못하였다.
3. 신간회 해체
ㄱ. 민중 대회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이 일어나자, 신간회는 진상 보고를 위한 민중 대회를 개최하여 이를 전국적으로 확산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민중 대회를 불허하고 허헌, 홍명희 등 간부와 회원을 대거 구속하여 대회를 무산시키고 신간회 활동 자체를 봉쇄하였다. 민중 대회 사건으로 신간회는 큰 타격을 입고, 활동력이 크게 떨어졌다.
ㄴ. 해소론 대두
(1) 새 집행부 구성
민중 대회 사건 이후 새로 구성된 집행부는 김병로, 안재홍 등 합법 운동을 강조하는 인물들이 중심이 되었다.
(2) 해소론
새 집행부가 다소 온건한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자치론자들과 제휴하려 하자, 신간회 내 자치 운동 계열은 합법적인 범위에서만 활동하자고 주장하였다. 이는 급진적인 활동가와 사회주의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던 각 지회들의 반발을 초래하였고,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에 대한 비판을 넘어 해소를 주장하였다.
○ 신간회 해소론 해소는 단순히 해체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운동 형태로 발전한다는 의미로 쓰였다.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를 해소하고, 노동자 · 농민이 중심이 되는 계급 투쟁을 더욱 적극적으로 전개할 것을 주장하였다. |
(3) 사회주의 진영의 해소론 주장 배경
사회주의 진영에서 신간회 해소를 주장한 데는 집행부에 대한 불신이 계기가 되었지만, 당시 국제 정세의 변화도 크게 작용하였다. 1920년대 후반부터 소련의 코민테른에서 민족주의 세력과의 연합 대신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노선이 변경되고, 중국 국 · 공 합작이 결렬(1927)되자, 식민지의 반제국주의 민족 통일 전선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게 되었다. 1930년대 들어와 대공황으로 노동자, 농민의 쟁의가 격렬해지고 사회주의자들이 계급투쟁을 강화하면서 민족주의 진영과의 연대도 약해졌다. 또한, 신간회 내부에서 민족주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자, 민족주의 세력과의 협동을 부정적으로 생각하였다.
○ 코민테른의 노선 변화 코민테른은 1919년 레닌의 주도하에 결성된 국제 공산당으로, 식민지 민족 운동의 전략과 전술 등을 제시하여 한국인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와 같이 사회주의자들을 돕던 코민테른은 중국에서 국 · 공 합작이 실패하자 식민지에서 진행되던 민족 협동 전선의 해체를 지시하였다. |
(4) 해소 결정
부산을 비롯한 지방의 각 지회에서 신간회 해소를 결의하자, 1935년 5월, 전체 대회를 개최하여 사회주의자들은 일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다수로 신간회의 해소가 결정되었다. 이로써 최초의 합법적 민족 연합 전선이었던 신간회는 해체되어 비타협 민족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의 연대는 무너졌고, 사회주의자들의 합법적인 활동 공간도 사라졌다.
(5) 양대 세력의 진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은 조선학 운동 등 문화 · 학술 활동에 주력하였고, 사회주의 계열은 혁명적 농민 · 노동 조합을 결성하여 비합법적 반제국주의 항일 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이후 신간회를 대체할 조직은 다시 만들어지지 않았다.
4. 신간회 결성의 의의
ㄱ. 최초 최대의 민족 통일 단체
신간회의 해소는 일제의 탄압과 지도부의 타협주의, 사회주의 계열의 이탈이 빚어낸 결과였지만,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독립 방법론과 새 국가 수립 구상의 차이를 극복하고 일제에 대항하기 위해 결성된 최초 최대의 민족 유일당이었다.
ㄴ. 민중의 절대적 지지
신간회는 4년 3개월 만에 해체되었지만, 민중으로부터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으로 민족 연합 운동을 결성하기 어려운 시점에서 '민족적 대단결'이란 구호 아래 결성된 반일 사회 운동 단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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