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
ㄱ. 국외 독립군 기지 건설의 배경
1908년에는 의병 연합 부대의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하였고, 1909년에는 일제의 남한 대토벌 작전이 전개되면서 1910년을 전후하여 많은 의병과 애국지사들은 근거지를 만주와 연해주 등 국외로 옮겼다.
ㄴ. 북간도 지역의 무장 독립 전쟁 준비
(1) 한인 집단촌 형성
북간도 지역은 전체가 거대한 독립운동 기지와 같았다. 이 지역은 19세기 후반부터 수십만 명의 동포들이 이주하여 주민의 80%를 차지할 정도였고, 일찍부터 용정촌, 명동촌 등 많은 한인 집단촌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독립운동 기지를 세우기에 유리하였다.
(2) 독립군 양성을 위한 기반 조성
독립운동을 위해 이곳으로 옮겨온 민족 지도자들은 동포들의 결속을 다지고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실시하여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한인 집단촌을 중심으로 각종 자치 단체와 학교를 설립하였다.
(3) 간민회
이동춘 등은 자치 단체인 간민회를 조직하여 동포 사회를 이끌어 가면서 민족 교육과 한인들의 법적 지위 향상을 위해 노력하여 한인 사회의 형성과 단결에 크게 기여하였다.
(4) 서전서숙과 명동학교
이상설 등이 기숙학교로 서전서숙을 설립하여 철저한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고, 서전서숙을 나온 김약연이 명동 학교를 세워 서전서숙의 민족 교육 정신을 계승하였다.
(5) 중광단
북간도로 거점을 옮긴 대종교에서도 서일 등 종교 간부들은 중광단이란 무장 독립 단체를 만들고 사관 양성소를 세워 독립군을 양성하였다. 중광단은 3 · 1 운동 이후 북로 군정서로 발전하였다.
(6) 한흥동
러시아와 만주의 접경 도시인 밀산에는 이상설, 이승희 등에 의해 독립운동 기지인 한흥동이 건설되었다.
ㄷ. 남만주(서간도) 지역의 무장 독립 전쟁 준비
(1) 한인촌 건설
삼원보, 룽징, 왕칭, 옌지 등지로 한인들이 많이 이주하여 한인촌을 건설하였다. 이 지역에서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은 국권 피탈 이전에 신민회를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신민회는 나라의 운명이 기울어지자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적극적으로 나섬으로써 당시 의병 전쟁과 함께 항일 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다.
(2) 신민회(1907~1911)의 활동
㉠ 삼원보 개척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국외의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서, 이동녕 · 이회영 · 김동삼 등을 중심으로 남만주 유하현의 삼원보를 개척하여 독립 운동 기지로 삼았다.
㉡ 자치 기관 설립
자치 기관인 경학사를 만들고 항일 독립운동을 위한 인재를 양성하였다(1911). 경학사는 뒤에 부민단과 한족회로 발전하면서 독립군인 서로 군정서를 조직하였다. 한족회의 경우 삼권 분립의 원칙이 적용된 중앙 조직뿐만 아니라, 동포 사회를 효율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한 지방 조직도 갖추고 있었다.
㉢ 신흥 학교 설립
민족 교육과 군사 교육을 함께 실시하는 교육 기관으로 신흥 강습소로 출발하여 신흥 중학교, 신흥 무관 학교(1911)로 발전하면서 폐교될 때까지 3,000명 이상의 독립군과 지휘관을 배출하며, 가장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 기관으로 성장하였다. 특히, 신흥 학교 졸업생들이 중심이 되어 독립운동 기지로 백서농장을 건설하고 독립군을 편성 · 운영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 이회영(1867~1932)과 형제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나라가 망하자 전 재산을 처분하고 6형제와 함께 대가족을 이끌고 만주로 떠났다. 약 600억 원에 달하는 그의 전 재산은 남만주의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 학교를 세워 무료로 민족 교육과 수천 명의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고스란히 쓰였다. 이회영 자신은 일경에 체포되어 고문을 받다가 숨졌고, 그 형제들은 궁핍한 생활을 하다가 대부분 병사하거나 일가족이 몰살당한 경우도 있었다. 다섯째인 이시영만이 임시 정부의 국무 위원으로 활동하다가 광복 후 초대 부통령을 역임하였다.
ㄹ. 중국 내지의 항일 독립 운동 단체
(1) 동제사
1912년 대종교의 신규식이 조직하였으며, 박은식과 대동 보국단을 조직(1915)하고 진단이라는 잡지를 간행하였다.
(2) 신한 청년당
국권 피탈을 전후하여 많은 애국지사들이 중국으로 망명하여 쑨원을 비롯한 중국의 애국지사들과 교류하면서 활약하였으며, 1918년 상하이에서는 신한 청년당이 조직되어 활동하였다.
ㅁ. 연해주 지역의 무장 독립 전쟁 준비
(1) 신한촌 건설
이미 국권 피탈 이전에 많은 한인이 이주하여 집단촌을 이루면 살고 있었다. 연해주의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이들 한인들에 의해 독립 운동 기지인 신한촌이 건설되었다.
(2) 신한촌에서 조직된 독립 운동 단체
㉠ 각종 조직과 애국 단체
신한촌 지역을 중심으로 한민회, 한인 학교, 13도 창의군, 성명회, 권업회 등 독립운동 단체가 조직되었고, 민족 교육 기관이 설립되어 민족 교육을 주도하였다.
㉡ 권업회 조직
자지 단체인 권업회가 조직되어 민족의 권익 신장에 노력하면서 독립운동의 경제 기반을 마련하였다. 특히, 러 · 일 전쟁 10주년을 맞아 러시아인들의 반일 감정이 고조되자 흩어져 있던 무장 독립 단체들이 모여 효과적인 독립 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이상설, 이동휘를 정 · 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를 조직하였다(1914). 권업회는 학교와 도서관을 설치하였으며, 기관지로 권업신문을 발간하였다. 그러나 일제와의 관계 악화를 꺼린 러시아가 독립군의 무장 활동을 탄압하였기 때문에 분격적인 활동은 어려웠다.
㉢ 전로 한민족 중앙 총회
러시아 혁명(1917)의 분위기에 힘입어 연해주 한인 단체를 망라한 전로 한민족 중앙 총회가 결성되었는데, 이 단체는 3 · 1 운동 직후 임시 정부 형태의 대한 국민 의회로 발전하였다. 기관지로 한인 신보를 간행하여 독립운동의 새로운 진로를 모색하였다.
㉣ 한인 사회당 조직
1918년에는 이동휘 등에 의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 사회당이 조직되어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 운동이 등장하게 되었다.
ㅂ. 미주 지역에서 전개된 독립운동
(1) 한인 동포 사회 형성
1903년 하와이의 농업 이민을 계기로 미주 지역에 한국인 이민자 수가 증가하자, 이를 기반으로 독립운동 단체들이 결성되었다.
(2) 공립 협회
1903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안창호 등이 한인 교민을 중심으로 조직한 항일 독립 운동 단체로 재미 한국인 단체 통합 운동을 전개하였다.
(3) 대한인 국민회
㉠ 설립 배경
1908년에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본의 고문으로 활약하던 스티븐스를 사살한 의거가 일어나 미주 지역 한인들 사이에 민족 운동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이로 인해 미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고, 박용만 · 이승만 등이 여러 교민 단체를 통합하여 대한인 국민회를 설립하였다.
㉡ 활동
공개적으로 민주 광화국의 수립을 주장하였으며, 미국 본토 · 하와이 · 멕시코 등에 지회를 설치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또한 기관지인 신한민보를 발행하여 민족 운동의 진행 상황을 보도하였다.
(4) 대조선 국민 군단
1914년에 박용만은 하와이에서 대조선 국민 군단을 조직하여 동포를 대상으로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고, 멕시코 이주 동포들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해 숭무 학교를 세워 무장 투쟁을 준비하였다.
(5) 흥사단 조직
안창호가 1913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조직하여 군대 양성과 외교 활동에 역점을 두고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ㅅ. 일본의 독립운동 단체
한국의 유학생 최팔용, 송계백 등이 중심이 되어 2 · 8 독립 선언서 등을 발표한 조선 청년 독립단(1919) 등이 설립되었다.
○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의 의미
1910년대에는 국외 독립 운동 기지가 건설되었고, 해외 동포들이 다양한 독립 운동 단체를 설립하였다. 이에 따라 이 시기의 독립운동은 참여 계층의 다양한 저변 확대와 함께 국제 정세 변화에 민감한 영향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1920년대에는 무장 독립 전쟁이 활발히 전개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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