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임시 정부의 시련과 재정비
ㄱ. 임시 정부의 시련
(1) 자금난과 인력난
임시 정부는 1920년대 중엽을 고비로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연통제와 교통국의 발각되어 조직이 철저히 파괴되었고, 이로 인해 국내로부터의 지원이 줄어들어 자금난과 인력난을 겪게 되었다. 또한, 주안점을 두고 추진하였던 외교 활동도 강대국의 외면으로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2) 사상 대립
대한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관내 · 만주 · 연해주 · 미주 지역과 국내의 독립운동 세력이 참여와 지지가 있었고, 이념적으로도 민족주의 계열뿐만 아니라 사회주의 세력도 일부 참여하였으며, 노선 면에서도 이동휘 계열의 무장 투쟁론자 · 안창호 계열의 실력 양성론자 · 이승만 계열의 외교론자 등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진 인물들이 참여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독립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정부 내 지도자들 사이에 갈등이 증폭되어 갔다.
(3) 노선 갈등
임시 정부 초기의 주요 방략이었던 외교 독립론이 강대국의 무관심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외교 중심적인 임시 정부 활동에 비판적이었던 신채호 등 중국 관내 세력과 만주, 연해주 지역의 무장 투쟁론자들의 비판이 거세졌다. 그러한 가운데 1921년 국무총리 이동휘는 임시 정부 요인들이 흩어져 각자의 장점을 살린 활동을 하자고 제안하였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국무총리직을 사임하였다.
(4) 이승만 사임 요구
ㅁ미국으로 돌아간 이승만이 미국 대통령에게 국제 연맹에 의한 위임 통치를 청원하는 국제 연맹 위임 통치 제안 사실이 알려지자, 이승만의 대통령 추대에 반대하고 임시 정부의 외교 활동에 비판적이었던 신채호, 신숙, 박용만 등 독립 전쟁론자들은 이승만을 불신임하고 사임과 임시 정부 및 임시 의정원의 해산을 요구하였따. 그리고 새로운 독립운동 기관을 세우기 위한 국민대표 회의 소집도 요구하였다.
ㄴ. 국민 대표 회의 개최(1923. 1)
내분 사태에 빠져든 국면을 타개하고자 임시 정부는 국내외 독립운동 상황을 점검하고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국민대표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러나 당초의 취지와는 달리 임시 정부의 진로 문제를 놓고 개조파와 창조파가 양분되어 서로 맞서다, 1923년 5월 의장인 김동삼이 만주로 돌아가고, 개조파가 탈퇴함으로써 결렬되었다. 이후 창조파는 연해주에 독자적인 정부를 수립하였으나, 1924년 2월 일본을 의식한 소련 정부의 퇴거 요구로 새 정부는 해체되었다.
○ 개조파와 창조파 안창호(상하이, 실력 양성), 이동휘(연해주, 무장 투쟁), 김동삼(서간도, 무장 투쟁) 등이 중심이 된 개조파는 현재의 임시 정부를 이름에 걸맞게 개혁하여 존속시키자는 입장이고, 신채호(베이징, 무장 투쟁), 김만겸(연해주, 무장 투쟁), 문창범(북간도, 무장 투쟁) 등이 중심이 된 창조파는 임시 정부의 역할과 위치를 부정하면서 임시 정부를 해산하고 연해주로 옮겨 새로운 조직을 만들자는 입장이다. |
ㄷ. 임시 정부의 분열
국민 대표 회의가 실패로 끝난 이후 임시 정부는 내부 분열과 갈등으로 조직을 유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침체 상태에 빠졌다. 많은 독립 운동가들이 임시 정부에서 이탈하였고, 이승만과 안창호는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무장 투쟁 계열의 인사들도 만주로 옮겨갔다. 또한, 일부는 임시 정부와 같은 조직체에 환멸을 느끼고 무정부주의 운동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 정부는 대표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독립 단체의 하나로 전락하고 말았다.
ㄹ. 임시 정부의 재정비
(1) 개헌
이에 임시 정부는 미주 지역의 독립 자금을 독점하면서 대통령의 직무를 다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1925년 2월 이승만을 탄핵하고 구미 위원부를 폐지하였으며, 박은식을 제2대 대통령으로 추대하였다. 곧이어 헌법을 개정하여 대통령제를 국무령 중심의 내각 책임제로 개헌하였다. 이후 이상룡, 양기탁 등이 국무령으로 추대되었으나 내각 구성에 실패하였고, 1926년 김구가 국무령에 취임하였다. 김구는 1927년 개헌을 해 국무 위원이 주석을 차례로 맡은 집단 지도 체제를 갖추며 쇄신을 모색하였지만, 인력과 자금 부족으로 내각을 구성하기 어려울 정도로 세력이 약화되었다.
(2) 재정비
1930년대 중반까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었던 임시 정부는 이동녕과 김구를 중심으로 조직을 재정비하였다. 김구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1년 강력한 항일 무력 단체인 한인 애국단을 조직하였다. 이러한 노력으로 임시 정부는 유지되었고, 조국 광복을 위하여 끝까지 항전을 계속하여 많은 독립 운동 단체로부터 정통성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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