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일제의 식민정책 3

후니 NO.1 2022. 5. 11.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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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족 말살 통치(1931~1945)

ㄱ. 통제 정책 강화

(1) 군사력과 경찰력 증강

1930년대에 들어서 대륙 침략을 본격화한 일제는 군사력과 경찰력을 늘려 식민지 조선에 대한 감시와 탄압을 강화하였고, 경찰의 보조 기구로 자경단과 방공단 등을 두어 조선인을 감시하였다.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군과 경찰 병력을 한층 강화하였다.

(2) 사상 통제 강화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인에 대한 사상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으며, 언론 · 학술 단체에 대한 통제도 강화하였다. 특히, 각종 사회 운동을 펼치던 사회주의자들을 철저히 감시하고 탄압하였다. '사상범 예방 구금령'이라는 법령을 제정하여(1941), 사상범과 사상이 의심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아무 때나 구금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리고 일제가 정한 법 테두리 안에서 우리말로 발행되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의 신문과 잡지를 폐간하였고(1940), 우리 역사 왜곡에도 열을 올렸다.

(3) 사상범 검거

일제의 식민지 지배 정책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가들은 조선 통독부에 의해 사상범으로 분류되어 검거되었다. 독립운동이 지속되면서 조선 총독부의 사상범 검거는 갈수록 증가하여 형무소의 수용 범위를 초과할 정도였다.

 

ㄴ. 병참 기지화 정책

(1) 식민지 공업화 정책

㉠ 추진 배경

1920년대까지 일제의 식민지 경제 정책은 식량의 안정적 확보를 위한 농업 정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지만, 만주를 점령(1931)한 이후 1930년대부터는 농업과 더불어 공업 · 광업도 함께 발전시키는 농공 병진 정책을 추진하였다. 이로써 농촌에서는 공업 원료 증산을 위한 남면북양 정책을 실시하였고, 산미 증식 계획은 중단되었다.

 

◎ 남면북양 정책

일제는 일본 자본가에게 방직업의 원료를 안정적으로 보급하기 위해 남부지방의 농민에게는 목화를 재배하도록 하고, 북부 지방의 농민에게는 면양을 기르도록 하는 남면 북양 정책을 실시하였다. 이는 서양 열강의 보호 무역으로부터 일본의 방직 자본가를 보호하려는 의도였다.

 

㉡ 추진 목적

식민지 공업화는 대공황의 경제 위기 속에서 한국의 값싼 노동력과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나아가 침략 전쟁에 필요한 군수 물자를 원활히 공급하기 위한 병참 기지화 정책을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미쓰이, 미쓰비시, 노구치 등 일본의 대기업들이 1930년대 초 한국에 대거 진출하여 조선 총독부로부터 특혜를 받고 군수 산업과 관련이 있는 중화학 공업과 광업 부분에 집중 투자하였다.

㉢ 공업화 입지

중 · 일 전쟁(1937) 이후 일제는 조선을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만들었다. 이에 따라 만주와 가깝고 전력과 지하자원이 풍부하며, 값싼 노동력을 동원할 수 있는 북부 지방에서 금속, 기계, 화학 등 중화학 공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 군수 산업 발달

북부 지방의 공업화가 급진전되는 가운데, 중 · 일 전쟁으로 본격적인 전시 체제가 되자, 민간 소비가 크게 감소하여 소비재 생산이 위축되었다. 이에 따라 경공업보다 중화학 공업 분야의 비중이 커지고 경제 체제가 군수 산업 위주로 개편되었다. 일제는 군수 산업을 보호하기 위하여 한반도 남쪽 노동자들은 군수 산업이 발달한 북쪽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그리고 기업의 원활한 투자를 구실로 군수 공장에서의 노동 쟁의를 금지시키고 노동 운동을 가혹하게 탄압하였다(1938).

㉤ 지역적 불균형 심화

일제의 식민지 공업화 정책은 공업의 지역적 편차를 심화시켜, 농업과 공업은 물론, 경공업과 중공업 간 불균형이 심해졌다. 이는 국토의 균형적 발전을 저해하여 광복 이후 남북한 사이의 경제 문제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2) 양극화 심화

㉠ 대도시 성장

공업화가 진전됨에 따라 조선 사회는 서울을 비롯한 주요 도시에는 백화점, 영화관 등 새로운 건물과 상점이 들어서고 인구도 늘어났다. 흥남, 청진 등 신흥 공업 도시가 생겨나고 노동자 수도 급격히 증가하였다.

㉡ 대지주와 대상인 출현

일제의 공업화 정책에 편승하여 일부 대지주와 대상인들은 자산의 일부를 상업, 금융업에 투자하거나 정미소와 양조장을 비롯한 회사 설립에 나섰다. 이들은 인쇄, 고무, 의류 업종을 비롯하여 기계 기구, 자동차 수리, 기기 제조 등 상대적으로 높은 기술이 요구되는 업종까지 진출하였다.

㉢ 열악한 노동자와 농민의 삶

일부 숙련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은 미숙련 단순 노동자이거나 아동과 여성 노동자여서, 장시간 노동과 차별적 저임금 등 가혹한 노동 조건을 견뎌야만 했다. 또한, 농민들도 고율의 소작료와 각종 세금에 시달려 생활은 더욱 어려워졌다.

㉣ 국외 이주

빈곤한 생활에 시달리던 노동자와 농민은 더 나은 돈벌이와 일자리를 위해 일본의 대도시나 광산, 건설 현장을 찾아가거나 만주로 떠났다.

㉤ 주민 통제

이러한 상황에서 일제는 1932년 7월부터 농민의 '자력갱생'을 내세운 농촌 진흥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는 농민의 권익 신장이나 자립 지원과는 거리가 멀었고, '게으르고 무지한 한국인의 민족성을 일본인을 본받아 개조해야 한다.'는 정신운동으로 추진되었다. 이를 통해 일제는 농촌을 통제하고 소작 쟁의를 억제하여 식민지 지배 체제를 안정시키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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