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애국 계몽 운동 2

후니 NO.1 2022. 5. 7.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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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애국 계몽 운동의 전개

ㄱ. 대한 자강회(1906)

ㄴ. 대한 협회(1907)

(1) 조직

오세창, 윤효진, 권동진 등에 의해 대한 자강회의 후신으로 설립되었다.

(2) 활동

대한 자강회를 계승하여 역시 교육 진흥, 산업 개발, 애국 정신 고취, 민권 신장, 행정의 개선 등을 강령으로 내걸고 실력 양성 운동을 전개하였다. 계몽 활동을 벌이며 전국에 60여 개의 지회와 수만 명의 회원을 가진 단체로 발전하여 대한 자강회 때보다 훨씬 규모가 커졌다.

(3) 한계

일제의 한국 지배권이 더욱 강화됨에 따라 활동이 약화되었고, 일본의 통감 정치에 대해 본격적인 대응을 하지 못하면서, 오히려 의병 투쟁을 무모한 행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친일적인 경향을 보이기도 하였다.

 

ㄷ. 신민회(1907~1911)

(1) 조직

을사늑약(1905) 체결 이후 1907년을 전후하여 일제가 보안법 · 신문지법 등의 악법을 만들어 반일적 색채를 띤 계몽 운동을 탄압함에 따라, 합법적인 계몽 운동을 하기가 어려워지자 사회 계몽 운동가들은 국권 회복 운동을 비밀리에 전개하기 위해 신민회를 조직하였다.

(2) 중심 인물

주도적 인물인 안창호, 양기탁, 이동휘, 이승훈 등을 비롯하여 서북 지방의 기독교 신자 및 교사, 학생들과 신채호, 이동녕 등의 충청도 인사들을 망라한 비밀 조직이었다.

(3) 목표

신민회 역시 교육 진흥, 산업 개발, 국민 계몽, 식산흥업을 주장하였지만, 국권을 회복하고 공화정제에 바탕을 둔 근대 국민 국가 건설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전의 주장인 입헌 군주제를 탈피했다는 큰 특징이 있다. 신민회는 대한매일신보를 사실상의 기관지로 활용하여 일제의 침략 야욕을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민족의식과 국가 의식을 고취하고 입헌 정치의 필요성을 제시하였다.

 

★ 신민회의 4대 강령
1. 국민에게 민족 의식과 독립 사상을 고취할 것
2. 동지를 발견, 단합하고 국민 운동의 역량을 축적할 것
3. 각종의 상공업 기관을 만들어 단체의 재정과 국민의 부력을 증진 할 것
4. 교육 기관을 각지에 설치하여 청소년 교육을 진흥할 것 

(4) 국내 실력 양성 운동 전개

평양의 대성 학교, 정주의 오산 학교 등을 세워 청소년들에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여 인재를 양성하였고, 계몽 서적을 출판 · 판매하기 위한 태극 서관의 운영과 민족 자본을 형성하기 위한 자기 회사를 설립하여 문화 활동과 민족 산업의 육성에 노력하였다. 대중을 계몽하기 위해 강연이나 학회 활동을 열고, 출판물의 보급을 통한 문화 활동에도 힘을 쏟았다.

(5) 국외 독립 운동 기지 건설

1910년 국권을 상실할 위기에 처하자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다. 이에 일부 회원들은 국내에서의 공개적 활동이 어려워지고, 경제 · 문화적 실력 양성만으로 일제를 몰아내기가 불가능하다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국외에서의 무장 투쟁을 위한 노선을 채택하여 독립군 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특히, 이동휘, 신채호 등은 독립이 실력 양성의 전제 조건이라고 주장하면서 실력 양성론을 비판하고, 해외에 독립 운동 기지를 만들어 독립 전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장기적인 독립 운동의 기반을 닦아 독립 전쟁을 수행하려는 것으로, 대표적 기지로는 이회영 등이 남만주에 건설한 삼원보이었다.

(6) 독립군 양성

신민회는 국권을 회복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와 무장 투쟁을 벌이는 것이라는 주장에 공감하고 이를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주에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개척하고 신흥 무관 학교를 지어 독립군을 양성하는데 힘썼다. 이러한 신민회의 활동으로 애국 계몽 운동 세력이 항일 무장 투쟁을 전개해 온 의병 부대와 연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7) 해체

신민회의 국내 조직은 일제가 한국 강점 이후 날조한 105인 사건(1911)을 계기로 조직이 드러나고 국내에 남아 있던 세력이 탄압을 받으면서 해체되었다.

(8) 의의

신민회는 해체되어 무너졌지만, 신민회에 가담했던 애국지사들은 이후에도 나라 안팎에서 활발하게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 105인 사건

1911년, 안중근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황해도 일원에서 독립 자금을 모금하다가 적발되었다. 일제는 이를 빌미로 서북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배일 기독교 세력과 신민회의 항일 운동을 탄압하려고 데라우치 총독 암살 음모를 조작하여 수백 명의 민족 지도자를 투옥하고, 중심 인물 105인을 재판에 회부하였다.

 

● 신민회의 활동

지역 실력양성 활동 방향 내용
국내 문화적 민족 교육 추진 대성 학교 → 평양, 오산 학교 → 정주
민족 문화 개발 대한 매일 신보 발간 → 기관지
조선 광문회 조직(박은식, 최남선) → 민족 고전 간행
경제적 민족 산업 육성 자기 회사 설립 → 평양
태극 서관 → 평양, 대구
국외 군사적 독립 운동 기지 건설 남만주 삼원보에 경학사 설립 → 이회영, 이상룡
밀산부 한흥동에 서전 서숙 설립 → 이상설, 이승희
신흥 무관 학교 설립 → 군사적 실력 양성 운동(무장 투쟁의 기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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