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

일제의 국권 침탈 2

후니 NO.1 2022. 4. 30. 15:35
반응형

1. 제2차 한 · 일 협약(1905. 11, 을사늑약, 통감 통치)

ㄱ. 과정

일제는 러 · 일 전쟁에서 승기를 잡자 미국과는 가쓰라 · 테프트 밀약(1905. 7), 영국과는 제2차 영 · 일 동맹(1905. 8)을 맺은 후, 전쟁에서 승리하자 러시아와 포츠머스조약(1905. 9)을 체결하여 국제 사회로부터 한반도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을 승인받았다.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막으려는 영국과 미국은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하였고, 러시아도 포츠머스 조약에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인정한 것이었다.

ㄴ. 일제는 한국의 외교권을 대행하기 위해 일본인 통감을 둔다는 것을 주요 내용으로 한 을사늑약의 체결을 한국 정부에 강요하였다. 일본 정부의 특사로 한국에 온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군을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한 상황에서 고종 황제와 정부 대신(참정 대신 한규설, 탁지부 대신 민영기)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규설을 감금하고, 이완용 · 박제순 등 을사 5적에게 군사적 위협을 가해 일방적으로 을사늑약을 발표하였다. 공식 명칭도 붙이지 못한 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일제는 1906년 2월 통감부를 설치하여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완전히 발탁하였다. 이로 인해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하여 늑약에 규정된 외교권뿐만 아니라 재정 전반을 좌우함으로써, 대한 제국은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 초대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내정 간섭

초대 통감으로 취임한 이토 히로부미는 일단 한국 내 일본 세력을 굳히고 통치 방식을 개선하여 한국인의 환심을 사려고 하였다. 그러나 고종 황제와 측근 세력의 저항 때문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에 이토 히로부미는 정부 대신과 일본인 고문관 등으로 시정 개선 위원회를 구성하여 국가의 중요 사무를 논의 · 의결하고 황제에게 재가를 받도록 하여 의정부를유무실 하게 만들었다. 이후 의정부마저 폐지하고 내각제를 반포하여 황제가 국정에 간여할 수 있는 권한도 제도적으로 박탈하였다.

 

ㄷ. 을사늑약에 대한 국내의 저항

(1) 고종 황제의 대응

이에 고종 황제는 대한매일신보에 자신의 늑약 체결을 거부하였으며 서명 날인을 하지 않았음을 밝히고, 이를 이유로 국내외에 늑약의 무효를 선언하였다. 고종 황제는 늑약을 무효화하기 위해 이승만과 헐버트 등을 미국에 특사로 파견하여 도움을 구하기도 하고, 헤이그 만국 평화 회의에 특사를 파견(1907)하여 늑약의 무효를 거듭 밝히려 하는 등 다방면으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2) 헤이그 특사 파견

을사늑약으로 외교권까지 강탈 당하자 고종 황제는 우리의 입장을 전하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외교권이 없는 상태에서 특사를 파견한 행위를 문제 삼은 일본의 방해로 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회의장 밖으로 나가서 기자 회견을 통해 을사 늑약의 불법성과 일본의 침략상을 국제 여론에 폭로하는데 그쳤다. 이와 같이 헤이그 특사 파견은 일제의 방해와 일제의 한국 병합에 대한 열강들의 암묵적인 동의로 큰 소득을 얻지 못하고 냉혹한 국제 질서만 확인하였다.

(3) 언론의 대응

언론은 일제의 통제에도 불구하고 선봉에 나서 국민의 여론을 환기시켰으며, 황성신문의 주필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항일 논설을 실어 을사늑약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일제를 규탄하였다.

(4) 상소 운동과 의병 봉기

관료와 유생들은 조약 폐기와 을사 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 운동을 전개 하였고, 전국 각지에서 항일 의병(채응언, 민종식, 최익현, 임병찬, 신돌석, 유인석 등)이 봉기하였다.

(5) 자결 순국

고종의 시종무관장에 이었던 민영환, 조병세, 이한응, 홍만식 등 전 · 현직 관료들과 유생 이건석 등은 자결로써 항의하였고, 조병세 · 송병선 등도 스스로 순국하였다.

(6) 철시 운동과 동맹 휴학

서울의 상인들은 상가 철시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학생들도 항의의 뜻으로 동맹 휴학으로 저항하였다.

(7) 5적 암살단 조직

나철과 오기호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 5적을 습격하였으나 실패하였다.

(8) 외교 고문 저격

장인환과 전명운은 외교 고문으로 통감부의 한국 통치를 찬양하고, 한국 침략을 정당하다고 선전하는 미국인 스티븐스를 샌프란시스코에서 사살하였다(1908). 스티븐스는 일제에 의하여 대한 제국의 고문을 왔다가 미국으로 돌아간 후 ' 항구적인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는 무능한 한국이 독립을 포기하고 일본의 보호를 받음은 물론 그 일부로 편입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선전하였다.

(9) 이토 히로부미 처단

연해주와 두만강 일대에서 의병 투쟁을 전개하던 안중군은 1909년 러시아와의 밀약을 체결하기 위해 하얼빈에 온 한국 침략의 원흉이자 을사늑약 체결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초대 총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안중근은 재판과정에서 '대한의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로 대우해 줄 것'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 안중근의 동의단지회

1907년 2월 7일 러시아령 연추하리 마을에서 안중근은 김기룡 · 강기순 등 동지 11명과 함께 단지 동맹을 맺고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동의단지회를 결성하였다. 안중근은 태극기를 펼쳐 놓고 왼손 넷째 손가락 한 마디를 잘라 "대한 독립"이라는 혈서를 쓴 다음 '대한 만세'를 삼창 하였다. 마침내 10월 16일 단지 동맹의 결의를 실천하기 위해 안중근은 중국 하얼빈에서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였다.

 

(10) 이완용 습격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려던 이재명은 안중근 의거 후 일제의 침략 원흉들보다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 수립의 지름길이라 생각하고, 친일 매국노를 처단하기 위한 비밀 결사를 조직하였다. 그리고 명동 성당 앞에서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혀 을사 5적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반응형

'한국사 공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도  (0) 2022.05.02
일제의 국권 침탈 3  (0) 2022.05.01
일제의 국권 침탈 1  (0) 2022.04.29
대한 제국 2  (0) 2022.04.28
대한 제국 1  (0) 2022.04.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