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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선대원군 2

오페르트 도굴 사건과 신미양요

1. 오페르트 도굴 사건(1868) ㄱ. 발단 병인양요 이후 미국은 독일 상인 오페르트를 앞세워 조선에 들어와 지방관에게 두 차례에 걸쳐 통상을 요구했으나 거부당하였다. 이에 오페르트는 미국의 자본가와 프랑스 선교사의 지원을 받아 무장한 선원 140여 명을 데리고 덕산군 관아를 습격하였다. 또한, 남연군의 유해를 미끼로 통상 조약을 체결하기 위하여 흥선 대원군의 생부 남연군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지역 주민의 저항으로 실패하였다. 달아난 오페르트는 영종도에서 다시 통상 요구하다가 정부의 완강한 거부에 밀려 쫓겨났다. ㄴ. 결과 이 사건을 계기로 국내에서는 서양인들을 오랑캐로 여기는 풍조가 널리 퍼졌고, 서구 열강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의 경계심이 더욱 높아졌으며, 대원군은 천주교 탄압과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한국사 공부 2022.04.05

흥선대원군 1편

1. 흥선대원군의 집권 ㄱ. 국내외 정세 19세기 중엽 조선 사회는 안으로는 세도 정치로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고 삼정의 문란이 극에 달해 농민 봉기가 빈번하였고, 밖으로는 일본과 서양 열강의 통상 요구 위협이 거제지고 있었다. ㄴ. 흥선 대원군의 집권(1863~1873) 안으로 사회적 동요가 일어나고, 밖으로 외세의 통상 수교 요구가 거세지고 있는 상황에서 1863년 철종이 후사 없이 죽고, 흥선군의 둘째 아들 고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26대)에 올랐다. 이에 고종의 아버지인 이하응이 흥선 대원군이 되어 안동 김씨의 권력 독점을 못마땅해 하던 신정 왕후(고종을 즉위시켜 대왕대비로서 수렴청정을 하였고, 흥선 대원군에게 정책 결정권을 주어 대원군의 집정을 이루게 함)의 도움으로 정치적 실권을 잡았다..

한국사 공부 2022.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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